17세 정이신(鄭履新)
산재 정공이신 행장(山齋鄭公履新 行狀)
공의 휘는 이신(履新), 자는 수지(綏之), 자호(自號)는 산재, 성은 정씨로 해주 사람이다. 공은 영조 갑술(1754) 윤 4월에 고남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이한 자질이 있었다. 길거리에 나가 놀 때, 초목의 새싹을 꺾지 않고 걸음을 걸을 때 개미집을 피하였으므로, 듣는 이는 그 덕이 있음을 알았다.
점차 성장하여 월뢰 조명국(月瀨 曺明國)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였는데, 삼년도 안되어 통감(通鑑)과 사략(史略)을 독파하였고, 그 이듬해 여름에는 능히 문구(文句)를 엮어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구절이 있었으므로 조공(曺公)은 기재(奇才)라 칭찬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속학(俗學) 이외에 유가의 위기학(爲己學)이 있음을 알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선생을 사사하여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강론, 변석(辨晰)한 바가 많았으므로, 이선생이 크게 격려하였다.
공은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여 아침저녁 문안을 오래도록 거를 수 없으므로 집으로 돌아왔다. 또 만암(晩巖) 김숭묵(金崇黙)을 찾아 질의(質疑)하자, 김공은 그 학문을 시험해 보고 매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기는 데 먼저 순응하여 그 뜻을 어김이 없었다. 일찍이 마마를 피하여 딴 곳에 나가 있다가 갑자기 모친의 병환 소식을 듣고 백리 길을 걸어 당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이 대문 앞에 서서 저지하면서 이르기를 『시탕(侍湯)에는 딴 자제가 있다. 지금 마을에 마마가 한창 번지고 있으니, 괜한 모험으로 모친의 걱정을 끼쳐 드릴 수 없다』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고 들어갔다.
그러나 끝내는 아무 탈이 없었고 어버이의 병도 약간 나아졌으므로, 이웃에서 다 효성의 소치이다 하였다.
갑오(1774)에는 모친의 상을 만나 그 슬퍼함이 법도에 넘었고, 항상 악실(堊室)에서 거처하였다. 추위가 심하여 온 벽이 꽁꽁 얼었으나 빈소를 떠나지 않았다.
심한 병이 없으면 질대(絰帶)를 벗지 않다가 야위고 병이 나서 거의 집상(執喪)할 수 없게 되자, 부형이 억지로 육즙(肉汁)을 전하였고, 병이 나아지자,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갑진(1784)에는 부친의 상을 만나 초종(初終) 범절에 정의와 의식을 아울러 다하여 조금의 유감도 없었고, 아침저녁 슬피 곡하였으므로 이웃이 도리어 오열하였으며, 하루에 두 번씩 묘소를 찾았는데 비바람에도 피하지 않으므로 초동목수(樵童牧叟)도 감읍(感泣)하면서, 참으로 효자라고 하였다.
아우와 우애가 있어 계씨의 병에 손수 대변을 치웠고, 10년 동안 한 이불을 사용하였으며, 의복도 함께 입곤 하였다.
1791 ~ 1792년의 흉년을 만나서는 한 가지의 먹을 것을 얻으면 먼저 들지 않고 먼저 사람을 시켜서 계씨의 사정부터 묻곤 하였다.
무릇 제사에는 선조에 대해 애(愛)와 경(敬)을 다하였고 제물의 풍성을 요하지 않았으며, 사람이 소를 잡아 포로 만드는 것을 보면,
『나라에 금령(禁令)이 있으니, 희생을 잡는 일은 온당치 못한 듯하다. 가세에 맞추어 닭이나 돼지를 대용한들 무엇이 나쁘겠는가』하였으며, 재계가 끝나는 날에도 문 밖에 나가지 않았다.
가세가 본시 청한하였으나 조수(操守)가 더욱 확고하여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일찍이 남에게 의롭지 아니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처자에게 경계하기를 『남에게 빌리지 말라. 만약 갚지 못하면 신용을 잃게 된다』하였다.
일찍이 식량 사정이 급하여 김하주(金河柱)에게 편지를 보내어 꾸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김공은 답하기를,『형까지도 남에게 이 같은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사나운 정사(政事)가 호랑이보다 더 심한 것을 알겠네』하였고 한 사람이 비웃기를,『가난한 집에서 모자라는 것을 꾸는 일은 상례인데, 그대의 처자에게 경계한 말은 스스로 그 잘못을 답습한 것이다』하였다.
공은 사례하기를,『친구 사이에 서로 빌리는 일이 상례이기는 하나, 그 사람이 아니면 불가하다』하였다.
일찍이 수일동안 끼니를 잇지 못한 적이 있었으나 이웃에서는 그 글 읽는 소리만 듣고 굶주리는 줄을 알지 못하였으며, 울타리가 초라하고 집이 쓸쓸하였다.
아이들이 혹 밭을 가꾸고 있으면 공은 『학문을 힘쓸 나이에 그 지취(志趣)가 낮으니 더 무엇을 보겠는가』하며 개탄을 마지않았다. 집안 자제들을 산재(山齋)에 모아 놓고 소학(小學)을 가르쳤는데, 가르침에 차등을 두고 그 과정을 엄격히 하여 건너뛰기를 경계하면서, 『이는 우리 집안에 대대로 전해 오는 심법(心法)이다』하였다.
서적에 대한 벽(癖)이 있어 젊어서 늙음에 이르도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더욱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과 모든 성리서(性理書)를 깊이 탐구하여 천인(天人)·성명(性命)의 즈음을 깨달았으며 제자백가의 글도 두루 통하였다. 그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고상하였고, 손을 대하는 데는 각기 그 사람에 따라 조용하고 관대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글 읽는 선비임을 알지 못할 정도였다.
김상발(金相發)은 만년에 사귄 친구였다. 공이 그 집을 방문하여 기삼백(朞三百)의 주설(注說)과 태극음양(太極陰陽)의 묘리(妙理)를 설명하자 김공은 기쁜 표정으로, 『이 고장에 이같은 고사(高士)가 있었으나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하였다.
벗을 사귀는 데는 다정한 사람을 취하여 세속과 구차히 따라가려 하지 않았으며 모나게 굴지 않고 자신을 보통 사람처럼 여기어 마치 유약한 사람으로 자처한 때문에 세상에서는 더러 공의 신분을 알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신당선생의 실기(實記)를 교정하는 일로 대둔사에서 조구당(趙舊堂)과 회합하였는데, 구당이 물러나와 사람에게 말하기를,『뜻 박에 30리쯤 되는 거리에 이 같은 은덕군자(隱德君子)가 있는 줄을 몰랐다』하였다.
도사(都事) 이사겸(李思謙)은 공을 한번 만나 보더니 마음을 허락하여 동료들에게 공에 대해 늘 말하기를,『정수지(鄭綏之)는 학문에만 전력할 뿐 애당초 이해득실의 영역에 뜻이 팔리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공경하고 부러워해도 미칠 수 없게 한다』하였다.
기미(1799) 정월 19일에 46세를 일기로, 종질 유숙(惟俶)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 고남의 성산(星山) 간좌에 장사지냈다. 배위 함양 박씨(朴氏)는 내경(來慶)의 따님으로 임신(1752) 정월 14일에 태어나서 갑신(1824) 3월 24일에 세상을 떠나 상곡(上谷) 경좌에 장사지냈다.
아! 공은 뛰어난 재주로 일찍부터 조명국에게 나아가 시인의 정맥(正脈)을 체득하였고, 중년에는 대산 이상정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다.
물러나서는 강우(江右)에 거처하며 성현의 글에 마음을 쏟았을 뿐, 위세를 두려워하거나 가난을 병으로 여기지 않았고, 겸손하고 옛 것을 좋아하는 정성에 변함이 없었다.
공의 발인 때에는 탁천(濯泉) 김호찬(金虎燦) · 팔포(八圃) 권사한(權思漢)·탄은(炭隱) 이사겸(李思謙) 등이 곡과 만사(輓詞)에 이어 제를 드렸다.
여러 만사 중에,
『옛날 평천의 화석은 그대 선조의 집인데, 10년 깊숙한 산은 처사의 거처일세. 바르고 상세하여 마음 간수하는 법 얻었고, 박식(博識)은 온 서가(書架)의 서적을 통하였네』하였고, 또,
『옛날 누가 남주의 고사전(高士傳)을 지었던가 내 수중에 붓 없는 것이 유감일세』하였으며 또
『저승에는 형제 서로 만나는 즐거움 있겠지만 살아 있는 우리는 어떡하라는 건지!』하였고, 또,
『그 말은 청고해서 읽는 것보다 낫고, 시는 교훈이 담겨져 스승이 될 만하였네』하였으니, 이는 다 당시에 사실을 모은 말로 공의 아름다운 행덕의 줄거리를 볼 수 있다.
아! 공의 평소에 남겼던 약간의 시·문(詩文) 잠경(箴警)이 거의 다 좀벌레에 상하여 그 여광(餘光)을 볼 수 없으니, 어찌 자손의 통한뿐이겠는가. 세대가 점차 멀어지고 유광(幽光)이 영원히 인멸될까 염려하여, 그 대략을 뽑아 모아 이다음 집필군자(執筆君子)를 기다린다.
병신(1956) 9월에 방후손(傍後孫) 우섭(禹燮)은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