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정유성(鄭惟城)

만포 정공 유성 행장(晩圃鄭公惟城 行狀)
공의 휘는 유성(惟城), 자는 성집(聖集)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영명하였다. 다섯 살에 입학하여 이미 문리(文理)를 알았고, 점차 자라서는 항시 어른 곁에 있어 좋은 말이 나오면 깊이 생각하여 듣는데 온종일 피로한 빛이 없으므로 보는 이가 기이하게 여겼다.
부친이 소학(小學)을 가르치면서, 『처음 배울 때 만약 학문에 게으르면 끝내 성취할 수 없다』하였다. 공은 경전(經傳)을 연구하는 한편 제자백가와 역사를 두루 통하였고, 완전히 알기 이전에는 그만두지 아니하며 그 집에다가 『호고(好古)』라고 써 붙였다.
강좌 권만(江左 權萬)의 문하에 나아가 학업이 날로 진취되었고, 일찍이 월뢰 조명국(月瀨 曺明國) 암천 홍휴(庵天洪休) 성재 김숭덕(省齋 金崇德)과 절친하여, 의론이 고고(高古)하고 문장이 매우 간결하였다.
시문(時文)에 부합되지 않아 누차 응시하다가 낙제되었으나, 어버이가 생존한 때문에 그만두지 않다가 늦게야 비로소 합격되었다. 판서 홍수보(洪秀輔)는 논평하기를 압강 동쪽에는 그 적수가 없다 하였고, 창해 정난(滄海 鄭灡)은 논평하기를, 성집(聖集)의 문장은 글자마다 좀도 붙지 않는다고 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어머니 조씨(曺氏)의 상을 만났는데 너무 슬퍼하다가 건강을 거의 지탱하지 못할 뻔하였고, 조상을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데는 예대로 하였다.
상례(常禮)와 변례(變禮)를 참작해서 이름을『봉선잡의(奉先雜儀)』라 하여 가문의 규칙으로 삼았고, 일찍이 선대의 문헌이 병화에 산실(散失)된 것을 유감스럽게 여겨 가전(家傳)을 모아 사모하는 뜻을 붙였다.
갑오년(1774)에는 조그마한 집을 지어『만포수월헌(晩圃水月軒』이라 편액하고 기문(記文)을 지었으며, 좌우에 도서와 잠명(箴銘)을 비치하여 향상학(向上學)에 전력하였고, 태극도(太極圖) 천명도(天命圖) 안상도(案上圖)를 합쳐 1첩으로 만들어 항상 잠심(潛心)해서 연구하였다.
안상도는 곧 신당선생의 전도(傳道)이다. 여기에 염낙(溓洛) 관민(關閩)과 도산(陶山)의 서론(緖論)을 채취하여 그 유에 따라 각목(各目)밑에 붙였는데, 화암 이사정(華巖 李師靖)이『안상도집설(案上圖集說)』이라 이름하였고, 구당 조목수(舊堂 趙沐洙)가 그 위에 쓰기를,『채집된 말들이 다 학문을 논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요결로 명백하고 정밀하고 적절하여 모두 그 조목에 적당하니 참으로 심경부주(心經附註)와 동일한 관건(關鍵)이다』하였다.
거처하는 곳에는 청소년의 일과차제도(日課次第圖)를 그려놓고, 자제들로 하여금 아침과 저녁으로 강습하게 하였다. 모든 형제자매와 더불어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허물이 있어도 책망하지 않고, 자신의 정의가 전달되지 못한 때문으로 돌리곤 하였다.
집을 다스리고 대중을 거느리는 데에 일체 성의를 위주하였고, 가까운 사람들의 길흉사에는 곳에 따라 마음을 다하였다.
조구당(趙舊堂)이 지은 서(序)에『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아우에게 우애하고 벗에게 신의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런 때문에 사귀기를 원하는 이가 많았으니, 바로 이화암(李華巖) 조구당 남저옹(南樗翁) 정삼퇴(鄭三退)등 여러분이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공의 아름다운 자질과 지극한 행실로 명현(名賢)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또 현부(賢父)의 교훈을 받아, 정(正)으로써 수양하고 학문으로써 닦았으니, 의당 입신양명하여 그 효도를 다하고 또 인애(仁愛)한 덕을 미루어 운용했다면 그 혜택이 많은 사람에게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수명을 주지 아니하여 중도에 가서 어버이 먼저 죽었으니, 이는 옛사람이 기수(氣數)와 인수(仁壽)가 서로 부합되지 않음을 유감스럽게 여겨온 바이다.

공의 종손인 전 부사 종현(宗鉉)이 공의 가장(家狀) 1통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행장을 청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이 소임을 담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부탁이 더욱 지극하기에 드디어 참고 서술하여 이다음 집필자의 손질을 기다린다.

통훈대부 전 공충도 도사(通訓大夫前公忠道都事) 풍산(豊山) 유주목(柳疇睦)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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