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 정필(鄭泌)
통정대부 행흥해군수 경주진 관병마첨절제 도위 정공 필 행장
(通政大夫行興海郡守慶州鎭管秉馬僉節制都尉鄭公 泌 行狀)
공의 휘는 필(泌), 자는 원여(源汝)로 해주 정씨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매하고 기백이 있어 속유(俗儒)의 소절에 구애되지 않다가 선대인의 교훈을 받은 뒤로, 그 전과는 달리 글을 읽어 점차 몸을 닦고 사람 다스리는 도에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무신(1848)에 무과에 올랐다. 이는 비록 우연히 얻어진 선대의 유업이기는 하나, 공의 본의가 아니었다.
어느 해 선전관에 임명되고 신미(1871) 7월에 흥해군수에 임명되었다. 흥해는 해변에 위치하여 어염(魚鹽)의 이점이 있으므로 전후에 관리의 탐종이 많아 백성들이 견디기 어려웠는데, 공이 부임해서는 묵은 폐단을 없애고 가난한 집을 쇄신하여 몇 달 사이에 인성(仁聲)이 온 경내에 들끓었다.
그해 12월에 부친의 상을 만나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예제대로 집상(執喪)하였다. 그 뒤부터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서사(書史)로써 스스로 즐겼고, 다시는 벼슬에 뜻이 없었다.
한가로이 지내다가 신묘(1891) 12월 24일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개령 오성촌 뒤 갑좌에 장사지냈다.
공은 선대의 유광(遺光)을 받아 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확고함이 금옥과 같고 초연함이 난곡(鸞鵠)과 같아 어릴 적부터 단서(端序)가 이미 정연(整然)하였다.
포의를 벗고 조정에 나가 그 포부를 시험할 적에는 지혜가 몹시 번거롭고 바쁜 일도 능이 처리하고 인(仁)이 모든 인물을 구제할 만 하였으므로 서울의 사대부 중에 평소 아는 이들은 다 공에게 원대한 업적을 기대하였다.
마침 기울어 가는 시기를 만나 길을 누빌 수 있는 준마가 그대로 굴침(屈沈)되어 있다가 늦게야 비로소 한 고을에 나갔고 이를 그만두고 돌아온 뒤로는 다시 시사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집에 있을 적에는 굵은 베옷으로 부들방석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몸가짐을 바로 하고, 날마다 성현의 글을 강구하였다.
그중에도『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좋아하여 되풀이해서 읽고 힘썼으니, 이는 그 마음에 체득하여 일용 행사에 운용하려는 것이었다. 가끔 일가 분들과 함께 이치를 강마하고 고금을 평론하여 학문을 돕는 도를 삼았고, 시정(時政)의 득실이나 관원의 장단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또 지팡이 짚신 차림으로 농막과 나무꾼 사이에 끼어 뽕과 삼에 관한 이야기를 그칠 줄 몰랐으므로 사람들은 명위(名位)가 있는 분인 줄 알지 못할 정도였다.
공은 인륜에 돈독하여 어버이를 효도로써 섬기고 아우를 우애로써 거느렸다. 집안을 예로써 다스리면서, 예가 없어지면 집안도 따라서 망한다고 하였다.
조상을 받들고 종족을 대하는데 행여 미진한 곳이 있을까 걱정하여 선대에서 겨를이 없던 묘전과 석물을 낱낱이 마련하였고, 한 종족 중에 친소의 다름이 있게 마련이나 이를 똑같이 대하여 모두 그 환심을 얻었다.
자기 몸에는 검소하고 남에게 후하며 남을 꾸짖는 데는 약하고 자신을 단속하는 데는 엄격하였다. 벗과 사귀는 데는 일찍이 친절한 표정이나 허물없는 언사가 없었으나 성의가 넘치고 화기가 애애하여 사람마다 그 덕을 보고 마음으로 도취하였다.
이 전에 그 선대인이 창설한 사계(射稧)가 오랜 세월에 규모가 흐지부지 되었으므로 남아 있는 자금을 수집해서 정성껏 식리(殖利)하여 큰 액수에 이르렀다. 다시 사계를 만들어 대충 범중엄(范仲淹)의 의장(義庄)을 모방하여 마을 중에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거나 상장(喪葬)에 비용이 없거나 혼인을 실기한 자에 대해 모두 규칙을 두어 진휼해 주었다.
또 봄과 가을에는 계원의 자제들을 모아서 효제충신의 도와 상부상조의 방법을 효유하여 느끼고 분발하는 바가 있도록 하였다.
공을 발인할 적에는 만사를 지어 곡하는 선비가 매우 많았다.
그중에 『집안에서의 규모는 검소한 냉유(冷儒)처럼 담박하고 향리에서의 교제는 베옷 입은 궁교(窮交 : 궁할 때의 사귐)처럼 허물없었다. 화월(花月)을 농평(弄評)하거나 세상을 무시하는 해학은 마치 사림의 고사(高士)와 같았으나 처사나 처신에 있어서는 일체 진실에서 나왔고 조금도 교만하거나 잘난체하는 뜻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공을 아는 말이었다.
공의 종손 관섭(貫燮)이 그 종제 우섭(禹燮)을 보내 그 가전(家傳)을 싸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서『이를 근거로 행장을 써 주어 이다음의 신증(信證)을 삼도록 하는 것이 이 잔약한 후손의 마음이다』하였다.
나는 한낱 후행(後行)으로, 공의 처소를 찾아 그 옥안을 직접 우러러 보지 못하였으나, 뒤늦게 공의 모든 자손과 교유하여 그윽이 공의 사행(事行)을 익히 들었다.
지금 비록 황폐하여 문자를 다룰 수 없으나, 평소 공을 흠모하던 터이라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 시종(始終)을 대충 서술하여 그 부탁에 응하는 바이다.
경오(1930) 제석(除夕) 이틀 전에
야성(冶城) 송준필(宋浚弼)은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