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 정난(鄭鸞) 행장

가선대부 봉훈랑 경양찰방 행 승정원 승지 운재 정공행장
(嘉善大夫奉訓郞 景陽察訪 行承政院承旨 雲齋鄭公 行狀)
공의 휘는 난(鸞), 자는 재우(載羽), 호는 운재(雲齋)이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자세로 학문에 전력하였고, 효행과 고결한 인품으로 당시에 추중(推重)되었으며, 일찍 사마시에 올라 문명이 혁혁하였다.

중종 정유(1537)에 성균관장으로서 기묘명현(己卯名賢)을 위하여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삼가 아뢰건대, 종사(宗社)의 경사로 대간(大奸)이 이미 제거되어, 조정이 위태롭던 두려움을 풀고 사림(士林)이 원통해 하던 분노를 씻게 되었습니다. 이는 바로 사정(邪正)을 확정하고 시비를 분별함으로써 옛것을 고치고 새것을 도모하여 태평을 보존할 기회입니다......
신에게는 국정을 꾀할 지위도 없고 직언을 드릴 책임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구한 마음이 스스로 놓이지 않아서입니다.
임금을 섬기는 마음에 격앙되어 서로 다름이 없고 공론에 발로 되어 존비의 차등이 없기 때문에 감히 초야의 위언(危言)과 나무꾼의 얕은 소견을 아뢰어, 전하께서 직언을 구하시는데 조금이나마 보답할까 합니다.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국가의 사기는 사람의 원기(元氣)와 같습니다. 원기가 허약하면 온갖 병이 침공하고 사기가 시들면 온갖 사(邪)가 편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명군(明君)은 사기를 붙드는데 급급해 왔습니다.
그 기(氣)란 천지의 양명(陽明)을 발양하여 의(義)와 도(道)를 짝하고 3강과 5륜을 부지하여 언제나 우주의 동량이 됩니다.
그 기를 직(直)으로써 길러 해침이 없으면 명분과 기강을 세우고 공사(公私)와 호오(好惡)를 구분하며 시비와 사정(邪正)을 분별하고 맑고 공정한 언론을 넓히며 탐오를 제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기를 보호하여 진작시키기를 생각하고 소인은 그 기를 꺼려서 꺾어 버릴 것을 생각합니다. 그 본심을 따져 보면, 털끝만큼의 사심도 없이 오직 임금만을 알고 자기의 몸을 불고하며, 오직 나라만을 알고 자기의 집을 불고하는 데 있습니다.
또 전하께서 교화를 일으키는 데 뜻을 경주하여 친근 신임하고, 자신의 허물을 지적함을 듣기 좋아하여 직간(直諫)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고, 좋은 계책 듣기를 좋아하여 건의가 있으면 반드시 따르시므로, 그 사람이 성상께서 기어이 지치(至治)를 흥기시키려 하심을 스스로 믿어, 우리 임금을 요순의 임금으로 만들고 우리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들 수 있다고 여기오나, 다만 옛사람의 글을 읽고 옛 일을 생각하며, 그저 세속의 침체됨을 개탄하고 시의(時宜)를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학교의 선비들만이 충(忠)을 그리다가 간(奸)에 화를 입고 정(正)을 내세우다가 사(邪)에 배척을 당하는 때문에, 대궐 앞에 엎드려 소(疏)를 올리고 궐문에 곧장 들어가 사실을 호소하면서 앞을 다투어 금부(禁府)에 수감되는 것도 사양치 않습니다. 이 어찌 유생의 하고픈 일이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깊이 감동되어 만에 하나라도 깨달으시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이후부터서는 기묘년의 일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하교하신 때문에 지금 조야의 사림이 저마다 시비를 환히 알고 있으나 건의하기 어려워 감히 말을 먼저 꺼내지 못합니다. 아!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남곤 심정이 앞에 처벌되고 김안로·허항·채무택이 뒤에 주륙되니, 온 나라의 생명체를 가진 자가 모두 뛰놀며 경축하였으나, 기묘년의 일에 대하여는 지금도 개탄하고 있습니다.
이 어찌 지하의 고골(枯骨)에게 아첨하기 위해서겠습니까. 신 등을 모두 무능한 존재로 국비만을 소비하면서 전하의 위아래 화육(化育)속에 살아 온 지가 하루나 한 달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역사를 보다가, 간험한 무리가 임금을 속이는 예를 보고도 오히려 책을 덮고 개탄했는데, 하물며 한 세대에서 직접 목도한 일이겠습니까. 마침 직언을 구하시는 기회를 만나 얕은 식견을 스스로 꺼리지 않고 어리석은 자도 한 가지 잘하는 일은 있다는 생각으로 상소하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여기에 뜻을 굳혀 주옵소서』하였다.

병오(1546)에 추천에 의해 봉훈랑(奉訓郞)으로 경양찰방(景陽察訪)에 제수되고, 을묘(1555)에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로 들어와 직간(直諫)이 많았다.

이상은 가승(家乘)과 대동야승(大東野乘) 중 초략(抄略)에 보인다.
후손 후시(厚時)는 짓다.

종친회종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