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 정탁(鄭逴)
증가선대부 병조참판 정공 휘 탁 행장(贈嘉善大夫兵曹參判鄭公行狀)
공의 휘는 탁(逴), 자는 유중(攸仲)으로 중종 정축년(1517) 개령(현 선산) 탄동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영오(穎悟)하고 몸가짐이 단정하였다.
장성하여서는 문장이 뛰어나고 품행이 아름답고 성실하였으며,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하여 가정에서 이의(異義)가 없었고 처사에 화경(和敬)하여 사람마다 부러워하고 탄복하였다.
갑자(1564)에 사마시에 올랐는데, 율곡 이이(栗谷 李珥)·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등 제현과 동방(同榜)이었다.
일찍이 노비가 남의 조상을 자기 조상이라고 투탁(投託)한 일로 권세가의 모함을 입어 마침내 하옥(下獄)되는 화까지 당하게 되었다. 제현의 적극적인 구원으로 임금에게까지 해명하여 석방되어 집에 돌아와 있다가 마침내 천명(天命)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계가 청한하여 장의(葬儀)를 갖추지 못하므로, 제현이 부물(賻物)을 보냈고, 방백과 인근의 수령들도 많은 부미(賻米)를 보내 후히 장사하였다.
임진왜란을 만나 선군(先君)이 모부인(母夫人) 한씨(韓氏)와 함께 안음에서 피란할 때, 조모가 병으로 그곳에서 별세하였는데, 피난하여 남의 집에 얹혀사는 중이어서 장사를 치를 수가 없었다.
그때 체찰사가 함양에 유진(留鎭)하고, 김성일이 초유사로 안음에 왔다가 선군(先君)을 방문하여 손을 잡고 흐느끼며 믿을 만한 군관(軍官) 두 명을 정하여, 하나는 장의(葬儀)를 맡고 또 하나는 치관(治棺)을 맡아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내고 이어 선군(先君)을 진하(鎭下)에 머무르게 하여, 두루 애호해 주기를 친 자제와 다름없이 하였으니, 만약 조부(즉 참판공 휘 逴)와 제현 사이에 도의(道義)의 사귐이 아니었다면, 그처럼 창황 급급한 즈음에 어찌 그와 같이 간곡할 수 있었겠는가.
일찍이 성균관에 있을 때 뭇 생도들과 근처의 동네에서 모여 명지(明紙)를 마름질하다가 손바닥만한 종이가 남자 한 사람이 들고 농하기를,
『율시(律詩) 40귀를 지어 이 종이에 빈틈없이 정서(精書)해야 하고, 또 고하(高下)를 비교하여 상(上)의 상(上)에게 미쳐야 한다』고 하였다.
공은 즉시 응낙하고 그 종이를 가져오자 뭇 생도들이 이르기를,
『형이 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를 위하여 주연을 베풀어 주고, 만약 해낸다면 우리가 형을 위하여 주연을 베풀어주기로 하겠다』하였는데, 공은 율시 40귀를 지어 그 종이에 정서하기를 일체 약속대로 하고 수문(首文)을 찾아가 시험해 보니, 과연 상의 상이었다.
제생이 불복하여 이르기를,
『지금의 대제학(大提學)이 그곳에 있으니, 상고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하고 다시 대제학에게 시험해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뭇 생도들은 하는 수없이 주석을 베풀어 실컷 즐겼다.
그 시조(詩藻:시의 멋)와 필묘(筆妙)가 그처럼 대성(大成)하였는데, 병화를 겪은 뒤에 유고가 산실(散失)되어 남아 있지 않으니, 자손된 자가 다 깊이 유감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을묘(1615)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니, 바로 선군(先君)이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이 된 때였다.
묘는 법광산(法光山) 독록(獨麓)에 있다 하나, 선롱(先瓏)이 누누(屢屢)할뿐 한 조각의 비석이 없고, 아무 언덕을 가리킬 뿐 분별할 수 없으니, 더욱 애통스럽다.
불초손 후시(厚時)는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