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구

장신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되어져 왔는데 신석기 시대에는 장식과 아울러 주술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장식성이 강화되어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귀고리, 반지, 팔지, 목걸이 같은 장신구가 기본 복식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장신구는 고려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여자들의 부덕이 강조되었으므로 일반 부녀자의 몸치장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곧 이러한 장신구의 사용은 상류층이 아니면 일반 서민의 경우 혼례 때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기녀들은 예외여서 일반 서민보다 장신구 사용에 제약을 덜 받았다. 조선시대는 금과 은의 사용이 제한되어 삼국시대의 찬란한 금속 장신구 문화에 견주어 오히려 쇠퇴하였지만 그 소박미와 정교성에서는 미의 극치를 이루었다.

귀고리
귓볼을 뚫어 작은 고리를 꿰던 것으로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도 사용하여 조선조 전반까지 성행하였다. 그 후에 이 풍습이 본디 오랑캐 풍습이라는 이유로 선조때 고치게 하였다. 귀고리를 다는 풍습은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유교 윤리와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자의 귀고리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여자의 귀고리도 귀에 거는 귀걸이가 되었다. 귀걸이는 귓바퀴에 거는 것으로 귀고리에 비해 단조로워 오색 술을 달아 보완하였다. 한때 귀고리의 길이가 길어 어깨까지 닿기도 했었지만, 요즘은 동정을 침범하지 않는 길이나 귀에 착 달라붙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남 보기에도 좋다. 칠보, 은, 옥, 수정 등을 계절에 맞게 사용하는 것도 고려 해봄직하다.

반지
반지는 인간이 사용한 장신구 중에서 가장 먼저 사용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장신구 중의 하나다. 반지는 남녀의 성혼의 의미로 교환하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각종 단체의 기념반지나 서약을 의미하는 의식에 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관습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관습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약 4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시대에는 화랑이 반지를 패용하여 단원들 간의 신의를 나타내고 단원임을 입증한 징표로 쓰인 듯이 보이며, 엄격한 가부장제도 밑에서 사치성을 띤 과분한 수식을 할 수 없었던 조선시대에도 가락지와 반지가 널리 패용되었는데, 궁에서조차 금의 사용을 금지했던 시절에는 도금이나 은을 사용한 가락지나 반지를 패용하였다. 이밖에 칠보, 옥, 마노, 호박, 비취, 진주, 동 등으로 만들어 계절이나 옷에 맞춰 끼었다. 가락지는 예나 지금이나 부부언약을 의미하며 정절을 나타내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가락지 패용의 의미와 관습은 거의 변함이 없으나 재료에 대한 기호나 그 장식은 많이 변하였다. '사절복색자장요람'에 나와 있는 반지 사용의 예를 보면, 가락지는 10월부터 정월까지 금지환을 끼고, 5월 단오 견사당의를 입을 때는 옥가락지나 마노지환을 끼며, 8월 광사당의를 입을 때와 9월 공단당의를 입을 때까지는 칠보지환을 낀다. 규칙이 이러하니 여름에는 금사용을 규제하고 겨울에는 옥을 규제하나, 봄, 가을에는 옷에 따라 마음대로 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허용되었다.
10월에서 정월까지는 금반지, 2월, 3월, 4월과 8월, 9월에는 은, 칠보반지, 5월 단오에서 7월까지는 옥가락지를 끼고, 대개 여름에는 옥 종류의 시원한 느낌의 소재를 끼며, 겨울에는 따뜻한 느낌의 금속반지를 끼면 어울린다.

노리개
노리개는 패물의 하나로 주머니와 크게 구분된다. 패물은 허리에 찼기 때문에 요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고려의 귀부인들이 허리띠에 금탁, 향낭을 찼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고려 후기에 저고리가 짧아지고 옷고름이 보편화되면서 패물 허리띠는 물론 옷고름에도 차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노리개이다. 그래서 겉고름, 안고름, 또는 치마허리에 차서 우리 고유의 복식미를 한층 고조시켰다. 노리개는 외형상 섬세하고 다채로우며 호화로운 장식이기도 하였지만, 정신적인 배경으로는 부귀다남, 불로장생, 백사여의 등 행복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어느 장신구보다 귀중히 여기고 아꼈다. 노리개는 신체에 패용해서 종교적으로 보신용의 노리개를 쓰는 경우와, 또 가지고 있는 부의 척도로써 보화를 남에게 과시하려는 장식적인 경우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종류는 그것을 만드는 재료, 색상, 문양, 의미 등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소재로는 금, 은, 보석이 가장 많이 쓰였고 자수나 장식적 부품 등으로 장식되었다. 값비싼 소재 대신에 서민적인 소재가 널리 쓰여 특정한 계층 없이 궁중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애용된 점 또한 노리개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노리개는 하나를 단독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여러 개를 같이 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3작 노리개가 많았다. 3작 노리개가 많았던 것은 동양인들의 3이라는 숫자를 길상의 수로 보는 이유가 있었고, 3개로 구성해 놓으면 가장 잘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3작은 하늘, 땅, 인간을 상징한다. 노리개의 명칭은 색상, 재료, 형태, 개수 등의 순으로 붙여지는데 이중 몇 가지만 살펴보면 수나비노리개, 옥 노리개, 나비삼작, 대삼작 등이 있으며 자손만대의 뜻으로 표주박삼작이나 고추모양의 노리개를 했고 박쥐, 나비 등은 복이나 신의 사자로서 장수를 뜻하며, 당의나 저고리 고름에 찼다. 향집노리개는 백옥이나 비취에 당초, 십장생 등의 길조나 '아'자 문양을 새겨서 달고 다녔는데, 사치적인 면보다는 가족을 위한 여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비녀
머리에 밑기름을 바르고 곱게 참빗으로 눌러 빗어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곱게 뒤로 모아서 총총하게 땋아 다시 낭자를 만들고 마무리 짓는 것이 바로 비녀다. 비녀는 계, 채, 잠이라는 명칭으로 불렸고 상고시대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조선왕조 후기에 국가에서 가발을 사용한 얹은머리를 금지하고 낭자머리를 적극 권장한 후부터 널리 성행하였다. 머리를 선조로부터 이어 받은 유산으로 여겨 자르지 않으므로, 긴 머리를 처리하는데 필수적으로 필요하게 되었으며 계급사회인 조선시대에는 여인들이 내외법에 묶여 마음껏 치장을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자르지 않던 습관이 있어 비녀에 대한 관심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비녀의 모양과 소재는 다양했는데 여인의 머리에 꽂힌 비녀를 보고 계급을 알 수 있었다. 비녀의 머리에 용을 새긴 것을 용잠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왕비만이 사용할 수 있었으며, 상류층 부인들은 각종 보석으로 장식이 많은 비녀를 사용했으며 서민들은 소박하고 장식이 없거나 작은 비녀를 사용하였다. 비녀는 긴 부분의 몸체와 머리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머리 부분은 비녀가 낭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장식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조각을 하고 보석을 붙여 머리 부분만 따로 만들어 붙이기도 하고, 통째로 몸체와 머리를 한 소재로 만들기도 했다. 비녀는 금, 은, 밀화, 산호, 칠보, 옥, 비취, 흑각 등의 재료를 썼다. 비녀 머리에 사용된 무늬종류는 다양하고 풍부하며 개성이 있다. 현대처럼 기계나 틀을 이용하여 다량 생산한 것이 아니라 소재의 개성을 살리면서 무늬를 표현하여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개성이 뚜렷했다. 머리가 크고 조각이나 장식을 금, 은, 주옥으로 한 몸체가 긴 것은 의례용으로 예복과 함께 사용했다. 서민들은 혼례 때 한번 정도 큰 비녀를 사용하는 특혜를 누렸다.

산호용잠
비녀의 머리에 용을 조각한 것이 대부분이나 꽃잎과 새가 어울려 조각되었고 중간에 은으로 된 것도 있다. 크기로 보아 예전에 노인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산호는 귀하기 때문에 주로 왕족이 사용했으나 사대부 집안에서도 결혼식 등의 의식 때 큰 머리에 용잠을 꽂았다.

흑각죽잠
비녀 전체를 흑각으로 만들고 잠두에 대나무 잎을 조각한 비녀이다. 대나무의 마디만을 나타내었고 다른 비녀에 비해 화려하지 않고 흑으로 되었기 때문에 상궁이나 혼자된 사람이 사용하던 비녀이다.

영락잠
궁중에서 왕비나 세자빈이 정초에 한 달 동안 머리에 꽂고 자신의 일 년 소원을 비는 뜻에서 머리에 장식했다. 백호, 산호, 천연진주, 자만옥, 공자석, 미라, 등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 희귀한 비녀로서 봉황과 나비의 떨잠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