硏究 論文
義妓 論介, 義巖碑記를 撰한 朝鮮 後期 嶺南 當代 最高의 文章家!!! 明庵 鄭栻先祖의 生涯와 文學世界 硏究 |
2022. 8. 31
明庵 鄭栻先生 武夷精舍 儒稧
『硏究 論文』
明庵 鄭栻先祖의 生涯와 文學世界 硏究
鄭 泰 鍾〈무이정사 유계 사무국장〉
〈들어가기 전에〉
明庵 鄭栻은 1683年(숙종 9년)에 晉州 玉峰洞에서 태어났다. 字는 敬甫이고 明庵은 그 號이다. 明庵은 死後 조봉대부 司憲府 持平에 贈職된 後『明庵 鄭栻先生 武夷精舍 儒稧』가 관장하는 武夷精舍(祠堂)에 配享되었다. 명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여 일생 동안 仕宦하지 않고 초야에서 포의로 지내다 일생을 마친 문학자이다. 그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인물 가운데서도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는 청나라는 미개한 오랑캐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배척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명나라를 높은 학문과 찬란한 문화를 가진 중국 역사상의 정통으로 인정하였다. 사람답게 사는 삶의 질이 높은 이상적인 국가로 명나라를 생각하였다. 그래서 청나라가 지배하는 세상에 나가서 벼슬하는 것을 더럽게 생각하였고, 어떻게 하면 중국 대륙에서 청나라를 섬멸하여 축출할까 하는 것이 일생의 話頭였다. 명암의 사상과 문학은 모두 이 화두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그이 號마져도 명암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의 고결한 정신자세는, 조선의 伯夷叔齊라 일컬어 손색이 없다. 청나라가 중국을 통치하고 있던 시대에 태어나 살았던 명암은, 名利를 초탈하여 명나라의 회복과 청나라의 축출을 염원하면서 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서, 出處의 大節을 지켜 곧게 깨끗하게 간고(艱苦)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는 선비 지식인으로서 국가의 운명에 무관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伯夷叔齊 이래로 이어져 온 선비의 節義사상이 이 시대상황에서 명암을 통해 체현(體現)된 것이었다. 그의 시는 淸淨하고 眞率한 폐부(肺腑)에서 흘러나온 것이기에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詩想이 다채롭고 진지하고, 표현의 기법도 독창적이라 이전의 시를 답습한 것이 아니고, 아주 핍진(逼眞)하게 사물을 묘사하였다.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섬세하여 그의 시는 내용적으로 뿐만 아니라 文藝的으로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산문 가운데는『矗石樓重修記』,『義巖碑記』등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글이 있지만,文學的으로 가장 뛰어난 글은 여러 종류의 遊山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산록은 산수문학의 典範으로서 韓國漢文學史에 도입시킬 가치가 있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明庵 鄭栻先祖의 生涯와 그의 詩文學의 독특한 면모를 밝혀, 韓國漢文學 硏究의 지평을 넓히고자 한다.
※ 키워드 : 무이정사, 무이구곡, 유람록, 명암 정식, 문학자, 진주 선비, 명나라, 청나라, 조선 후기
◇◇ 차 례 ◇◇ Ⅰ. 序論 Ⅱ. 傳奇的 考察 Ⅲ. 詩文學 考察 Ⅳ. 結論 □ 附錄 : 漢詩 ( ∼ P) ( ∼ P) ( ∼ P) ( ∼ P) ( ∼ P) |
Ⅰ. 序論
임진왜란(1592-1598)은 朝鮮은 물론이고, 中國과 日本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은 明나라에서 淸나라로 왕조가 바뀌었고, 일본은 막부가 바뀌었다. 조선은 왕조는 그대로 존속되었지만,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왕조에 의한 朱子學 일변도의 사상적 통제가 그 권위를 상실하게 되어 여러 가지 사상적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고, 피지배층은 지배층에 대한 신뢰도 많이 떨어지게 되었다.
종전부터 외교관계를 맺어왔던 명나라와 임진왜란 이후 새로 일어난 청나라와의 외교관계 설정이 통치자들의 큰 고민거리였다. 광해군 때는 현실적인 실리외교로 인하여 적장하게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지만, 仁祖反正으로 집권한 西人政權들은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명분외교에 집착하다가, 丁卯胡亂과 丙子胡亂을 연달아 당하여 결국 항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힘의 열세로 인한 항복에 의하여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은 것은 당시 시대상황으로 봐서 어쩔 수 없었지만, 당시 지식인들은 정신적으로 많은 갈등을 하였다.
마음으로는 내키지 않아도 조정에서 仕宦(사환)하고 있던 관료들은 청나라를 숭상하는 대열에 합류했지만, 재야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명나라를 숭상하는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재야의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出仕(출사)를 염두에 둔 사람들은 청나라를 배척하는 마음을 표방하지 않았지만, 출사를 단념한 사람들은 명나라를 숭상하는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청나라를 철저하게 배척하였다. 명암 정식은 명나라를 숭상하는 인물 가운데서도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는 청나라를 미개한 오랑캐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배척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명나라를 높은 학문과 찬란한 문화를 가진 중국 역사상의 정통으로 인정하였다. 사람답게 사는 삶의 질이 높은 이상적인 국가로 명나라를 생각하였다. 그래서 청나라가 지배하는 세상에 나가서 벼슬하는 것을 더럽게 생각하였고 어떻게 하면 중국 대륙에서 청나라를 섬멸하여 축출할까 하는 것이 일생의 話頭(화두)였다.
명암의 사상과 문학은 모두 이 화두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그의 號마저도 명암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의 고결한 정신자세는, 朝鮮의 伯夷叔齊라 일컬어 손색이 없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잘 모르고 있었던 明庵 鄭栻의 生涯와 그의 詩世界의 독특한 면모를 밝혀 韓國漢文學 연구의 영역을 넓히고자 한다.
Ⅱ. 傳記的 考察
1. 明庵의 生涯와 時代狀況
明庵 鄭栻先生은 1683년(숙종9년) 진주 玉峰에서 태어났다. 字는 敬甫이고, 명암은 그 號이다. 本貫은 海州인데, 대대로 宦業(환업)과 勳績(훈적)이 혁혁한 家門이었다.
高麗 때 典法正郞을 지낸 肅이 그 鼻祖(비조)이다. 朝鮮王朝에 들어와 贊成事를 지내고 諡號가 貞度公인 易이 있었다. 5代를 지나 諱 희검은 진사인데, 허암 희량의 아우이다.
燕山君의 亂政을 만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昭陽江 위에 숨어 스스로 漁隱이라고 號를 붙였다. 이 분은 명암의 6世祖이다. 고조 愼은 대사간을 지냈고, 증조인 鄭文益은 進士인데, 임진왜란 때 구국의 의병장 충의공 農圃 鄭文孚의 弟氏이다. 1624년 農圃가 李适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몰려 禍를 당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집안을 이끌고 남쪽으로 옮겨와 비로소 진주사람이 되었다. 명암은 나면서부터 資質이 英明하였고, 氣像이 우뚝하였다.
일곱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여덟 살 때는 글을 지을 줄 알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말을 지어냈다.
일찍이 새로 지은 적삼을 입고 있었는데, 헐벗은 아이를 보고는 벗어서 입혀 주었다. 열 살 때 누님을 만나기 위하여 서울로 가다가, 겨울 고개 위의 외로운 소나무를 두고 읊기를,“너는 太古의 마음이 있어, 눈 속에 서서도 봄을 잃지 않았네”라고 했다.
열세 살 때 族兄인 露頂軒 鄭構에게서 배웠는데, 이로부터 문예가 크게 진보되었다. 언행이나 擧動이 모두 法度를 따르니, 향리의 덕 있는 어른들이‘하늘이 낳은 참된 선비’라고 指稱하였고, 명암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명암에게 영향을 받아 감히 태만하지 못했고, 자기
도 모르게 용모를 가다듬을 정도였다고 한다.
열아홉 살 때 科擧에 응시하기 위하여 陜川의 시험장에 갔다가, 우연히 송나라 胡銓의〈斥和疏(和義를 배척하는 상소)〉를 읽고서, 문득 感慨하고 悲憤하여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한 때 오랑캐와 和義하는 것도 오히려 차마 할 수 없는데, 지금 천하는 결국 어떤 세상인가? 천지가 뒤집히고, 갓이 밑에 가고 신발이 위로 가듯 법도가 무너지고 질서가 어지러운 때이다. 대장부로 태어나서 어찌 차마 지금 세상에서 출세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우리 동쪽 나라는, 명나라에 대해서 의리상 君臣關係이고 은혜는 夫子關係와 같다. 어찌 차마 대수롭잖은 일로 여겨 잊을 수 있겠는가?(明庵 鄭栻 行狀 中)
이에 儒巾을 찢어 버리고 돌아와 明庵居士라고 스스로 號를 지었다. 늘 패랭이를 쓰고 다니면서 명나라에 대해서 슬퍼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붙였다. 세상 사람들과의 交遊를 끊고, 집에서 經書를 주로 일고 史書도 곁들여 일었다. 때때로 名山大川을 유람하였는데, 伽倻山, 太白山, 小白山, 五臺山, 개골산(金剛山), 묘향산, 금산, 月出山, 천관산 등에 발길이 두루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遊山記를 남겨 그 산수의 美麗(미려)함을 서술하고 자신의 感懷(감회)를 붙였다.
만년에 가족을 이끌고 두류산으로 들어가 무이산(*)의 아홉 구비 시내를 얻어, 무이정사를 짓고, 손수 朱子의 초상을 그려 벽에 걸었다. 또 龍潭의 위에 臥龍庵을 짓고 諸葛武侯의 초상화를 걸었다. 이 두 인물을 명암은 자신이 배울 만한 이상적인 인물로 간주하고 직접 가르침을 받는 스승처럼 모시고, 그 학문과 정신을 배우려고 하였다. 또 주자는 契丹族(계단족)이 세운 金나라의 和議를 반대하고 북쪽의 잃어버린 疆土(강토)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 인물이고, 諸葛亮도 魏나라가 차지한 中原을 회복해서 漢나라 皇室을 옛날 도읍하던 洛陽으로 옮겨가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인물이다. 이런 집 이름 속에는, 명나라를 부흥시켜 명나라의 수준 높은 문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명암의 염원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주) 武夷山 :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九曲山이다.
초연히 세상에 나가 출세할 생각은 끊어 버리고 혼자 산수속에 묻혀서 즐거워하며 금심을 잊어버렸다. 가난하여 자주 먹을 것이 없게 되어도, 고사리를 뜯고 솔잎을 먹으면서 느긋하게 지내며 마음에 두지 않았다. 스스로 明庵傳을 지어 자신의 뜻을 보였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公은 어느 곳 사람인지 모른다. 그 이름자도 모른다. 그 성벽이 보통이 아니어서, 착한 것을 따르기를 물 흐르듯이 하고, 나쁜 것을 싫어하기를 원수처럼 했다. 부유해도 즐거워하지 않고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았다.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고,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름난 경치 좋은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구애받지 않고 바로 갔다. 海東의 산수에 公의 발자취가 거의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일생토록 周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으로서 제일 가는 일로 삼았다. 세상 사람들이“명나라의 천지가 아니다”라고 말해도, 자신은 明나라의 천지라고 여겼다. 사람들이“明나라의 시대가 아니다”라고 말해도, 자신은 明나라의 時代라고 여겼다. 사람들이“명나라의 山水가 아니다”라고 말해도 자신은 명나라의 山水라고 여겼다. 사람들이“명나라의 백성들이 아니다”라고 말해도 자신은 명나라의 백성이라고 여겼다. 말이 명나라에 미치면 피 눈물을 흘러 내렸다. 만년에 頭流山에 들어가 무이구곡을 얻어, 朱子 및 諸葛武候의 초상을 걸고 아침 저녁으로 마주하고서 마치 살아 계신 분을 스승으로 섬기듯이 했다. 書架에는 詩經, 書經 등 책이 있고 뜰에는 매화, 대, 난초, 계수나무, 소나무, 국화가 있었고, 또 두 마리의 학 모양의 돌을 소나무와 계수나무 사이에 두고서 스스로 즐겼다. 贊(찬양하는 글)을 이렇게 붙인다.“명나라 세월, 명나라 천지, 무이산 아홉 구비의 물,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있으니 어떤 居士인지? 거사에 스승이 있으니, 晦菴夫子(夫子 : 朱子)라네.
丙寅(1746)年 5月 15日에 精舍에서 命대로 살다가 돌아갔으니, 崇禎(*)紀元으로부터 119年이고, 享年 64歲였다. 臨終 때 좌우를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오랑캐에게는 百年토록 지속하는 命運이 없는 것이니, 그 時限으로 계산해 보면 이미 지나갔다. 내가 죽기 전에 비린내 나는 티끌이 싹 걷히는 것을 볼 수 있겠거니 했거늘, 이제 끝장이구나 끝장이로다“ 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착한 일을 하거나 나쁜 일을 했을 때, 자신이 어찌 모르겠는가? 내 일생을 가만히 헤아려보니,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도다.“百世淸風’이니‘萬古綱常’등의 말을 나에게 적용한다”해도 내가 많이 사양할 것은 없다.“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大明處士’로 나의 銘旌을 쓰도록 하라”라고 했다.
철저하게 명나라 세상의 회복을 염원하다가 일생을 마쳤고 이 염원을 저 세상에까지 가지고 가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1760年(庚辰, 영조 36)에 觀察使 趙曮이 명암의 行蹟을 朝庭에 올렸다가, 8年 지난 1767年(영조 43)에 特別히 司憲府 持平에 贈職되었다. 벼슬을 贈職하는 敎旨에 오랑캐 나라인 淸나라의 年號를 쓰지 않고, 明나라의 마지막 皇帝 毅宗의 연호인 崇禎 紀元이라고 썼는데, 이는 실로 영조의 특별한 명령에 의한 예외적인 경우였다. 朝庭에서 義理를 장려하고 志節을 높이 평가한 결과였다.
당시 조정의 君臣들은 공식적으로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매우 싫어했고 명암의 이런 삶의 방식에 암암리에 讚辭(찬사)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주)崇禎 :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毅宗의 연호. 1628-1644. 朝鮮시대 사람들을 명나라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숭정연호를 계속 썼다.
2. 氣質과 思想
명암은 天分이 매우 높아, 세속의 명에나 이익, 運數 등에 대해서 원래 별 관심이 없었다.
참된 마음과 곧은 기운으로 바깥 사물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정신의 작용이 완전하였고, 이룬 바가 우뚝하였다. 맑기는 가을 물 위의 연꽃 같았고, 우뚝하기는 쏟아져 내리는 물살 속에 버티고 선 돌기둥(*) 같았다. 또 높은 하늘을 나는 기러기가 구름을 뚫고 가는 듯, 의로운 소나무가 눈을 뚫고 솟은 듯했다. 晩年에는 매화 대나무 소나무 계수나무를 사랑하였는데, 山水間을 逍遙(소요)하면서 즐겼다. 그가 사랑한 나무들도 모두 節槪(절개)를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마음 가짐이 철저하여 진실되게 마음을 써서 끝까지 간직하고 견고하였다.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안 뒤 실천했다. 나무 조각에다‘四勿箴’을 새겨 늘 옷의 띠에 차고 다니면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자신을 점검하였다.
매일 새벽 닭 울음소리를 들으면 곧바로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衣冠을 정제하고는 팔짱을 끼고 단정히 않아서‘周易’의 「繫辭傳」,「중용」,「대학」몇 章과 程子(정자)와 朱子가 지은 箴銘 및 諸葛亮의‘出師表’와 胡銓의 斥和疏, 杜甫의‘北征詩’를 외웠는데, 이렇게 하는 것을 항상 하는 일과로 하였다.
평소에 늘 伏羲氏, 주나라 文王, 周公, 孔子, 子思, 宋나라 周濂溪, 程子, 朱子 등이 지은 책을 쉬지 않고 읽었으며, 이것으로 생각을 적고, 이것으로서 뜻을 구하였다. 이 두 가지로써 자신의 평생 계획으로 삼았다.
간혹 명암을 세상을 잊고 산수간을 방랑한 인물로 간주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나, 사실 명암은 철저히 儒敎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살아간 인물이었다.
명암이라는 號는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이 담겨 있으니, 오늘날 사람들이 보면 事大的 발상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으나, 수준 높은 명나라의 정신문화를 회복·유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력을 앞세운 오랑캐나라인 청나라의 문화침략에 대한 지식인의 의로운 저항이었던 것이다.
王羲之와 衛夫人의 글씨를 배워 서예에서도 一家를 이루었다. 지금 九曲山 武夷九曲, 居昌 搜勝臺, 咸安 義相臺, 南海 錦山 등에 명암의 필적이 남아 있다. 산수를 유람하기를 좋아하였지만 자신의 操行(조행)에 매우 엄격하였다. 비록 해가 지고 어두워져 사람이 없을 때나 이름난 운치 있는 깊숙한 산수 속에 있을 때도 갓을 쓰고 정신을 집중하여, 일찍이 조금도 放縱(방종)하게 행동한 적이 없었다. 본래 술을 좋아하였지만 크게 취하여 체면을 잃은 적은 없었다. 정신수련이 대단하였는데, 智異山 佛日庵에서 面壁 중인 승려 두사람 곁에 가서
말없이 앉아서 삼일 동안 일어나지도 않고 눕지도 않았지만 정신을 한결같이 맑게 유지하였다. 두 승려가 함께 일어나 명암에게 절을 하고서 기이하다고 탄복하고는, 솔잎 죽을 끓여서 바친 일이 있었다. 온 천하가 청나라 세상이 된 상황에서도 명암 혼자 능히 대의를 등에 짊어지고서 곤궁하게 살면서도 죽을 때까지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정신이 바로 이런데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제사 때에는 반드시 정성과 敬虔함을 다하였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촛불을 밝혀 밤을 새웠다.
집안은 整然하게 法度가 있었다. 아들, 조카, 며느리, 딸들로 하여금 昏定晨省의 禮를 행하도록 했다.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훈계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주 지극하였는데, 고치면
주)돌기둥 : 河南省 三門峽에 있는 산. 黃河가 갈라져 돌로 된 이 산을 감돌기 때문에, 큰 돌기둥이 버티고서 어떤 물살에도 끄떡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만 두었다. 肅宗과 景宗의 초상 때 成服을 하기 전에는, 바깥에서 거적때기를 깔고 지냈
고, 因山(임금의 장례)전에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 親知들의 喪事에는 비록 관계가 멀고 신분이 천할지라도, 訃告를 들은 날에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사람들과 사귈 때는 진실하고 순박하고 간절하고 지극하였고, 모난 행동은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공경하였다. 비록 수레 끄는 종처럼 천한 사람이라도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欽慕하여 차마 속이거나 저버리지 못했다. 일찍이 어떤 衙前이 무슨 일을 가지고 공을 속였다. 여러 衙前들이 그 사실을 듣고서 모두 모여서 峻切하게 책망하기를,“비록 천한 것이지만 어찌 處士公(명암을 가리킴)을 속인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깊은 산속의 승려들도 기꺼이 맞이하여 공경심을 일으키지 않은 적이 없으면서 말하기를,“오늘은 鄭處士님을 모시게 되었도다”라고 할 정도였다. 명암은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굳세게 綱常(道德 倫理)과 더불어 무리가 되어 이미 재가 된 불씨를 다시 불어 일으키고, 다 없어져버린 陽의 기운을 붙들어 심으려고 하였는데, 그 힘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대개 天性이 그럴 뿐만 아니라, 타고난 氣質이 굳세어 굽히지를 않아, 다른 사람이 견디지 못하는 바를 능히 견디어 내었고,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바를 능히 해내었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특히 太極에 대해서 조예가 깊었지만 공허한 이론을 전개한 글은 남기지 않았다. 독서의 양이 많고 폭이 넓어 儒學에만 국한되지 않고 諸子百科 등도 두루 섭렵하였데, 특히 道家的 情趣(정취)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佛敎의 惑世誣民하는 측면과 사찰건물의 지나친 사치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마음 맞는 승려들과 교유를 하면서 많은 시를 주고 받았다. 명암은 본래 功名과 富貴를 헌 신짝처럼 던져버린 사람이었으므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草野에 묻혀서 求道者처럼 淸高하게 살았다. 그 당시 치열했던 당쟁에 혐오를 느껴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등진 것은 아니었고, 국가민족에 대한 관심을 갖고 늘 걱정하며 살아갔다. 조선 초기의 梅月堂 金時習 등 일군의 方外人들이 세상을 등지고 體制와 禮俗(예속)을 무시하고 世上에 冷笑를 보내던 생활태도와는 확연히 달랐다. 명암은 평생 명나라 문화를 그리며 그 회복을 바라다가 끝내 그 실현을 보지 못하고 만 아쉬운 生涯였다. 명암은 남의 요청에 의한 應酬文字(응수문자)는 몇 편 짓지 않았고, 순수하게 자신의 사상과 감정이 담긴 글만 남겼다. 한 평생을 티끌 만한 흠도 없이 자신의 원칙을 지키면서 깨끗하게 바르게 살다간 그의 일생이었다.
Ⅲ. 詩世界 考察
1. 明庵集에 대한 間略 紹介
명암은 수천 수의 시와 많은 문장을 남겼다. 그러나 명암 死後 곧바로 정리되어 간행되지 못하고, 보자기에 싸인 채로 있었는데, 손자 鄭擎天이 간행을 염두에 두고 鴻湖 李元培에게 시문 몇 편과 年譜 行狀을 보여 주고서 跋文을 받아 두었다. 그 뒤 農圃의 후손인 芝窩 鄭奎元(1818-1877)이 그 가운데서 약간의 글을 가려 뽑아 정리하였고 鷺湖 鄭斗彦이 거기에 약간의 加減을 하였지만, 간행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명암의 현손 鄭好善이, 명암의 시문이 장차 흩어져 영원히 없어져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그 一家들과 간행의 일을 도모하여, 여러 사족들에게 문의를 했더니, 여러 儒林들 가운데서 마음을 기울이고, 찬조금을 낸 집안이 백여 집안이나 되었다. 이 것에 힘입어 지리산 속에서 本板을 새길 준비를 하고, 月皐(월고) 趙性家에게 요청하여 교정을 보고, 집안 조카 鄭光羲, 鄭珪錫으로 하여금 깨끗하게 정리한 原本을 쓰게 했다. 그 일을 마치자 다시 자기 생질 李道復에게 부탁하여 명암이 남긴 글 가운데서 아직 수집하지 못한 글을 더 수집하게 하였다. 그 원고를 后山 許愈(허유), 老栢軒 鄭載圭에게 두 번째 校正을 부탁하여 6卷으로 만들었으니,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 簡略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本板으로는 찍지 못하고, 1901년에 6권 3책의 體制로 木活字로 찍어 내었다.「명암집」의 구성을 살펴보면, 맨 첫머리에 晉州牧使 趙德常이 1761년에 쓴 序文과 1901년에 趙性家가 쓴 序文이 붙어 있다. 제1권, 제2권, 제3권에는 시 653수가 수록되어 있다. 제4권에는 書 18, 記 7편, 跋 4편이 수록되어 있고, 권5에는 錄 6편, 傳 2편, 上樑文 1편, 祭文 4편이 수록되어 있다. 명암이 지은 산문은 모두 42편이다.
이 가운데서 명암의 詩와 遊山錄은 특히 문학적 가치가 높다. 산문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水月樓記』는 知足堂 趙之瑞를 享祀(향사)하던 新塘書院의 門樓에 붙인 記文인데, 지금은 毁撤되어 없어지고 터만 남은 신당서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矗石樓重修記』는 촉석루의 역사와 건물이 갖는 의의를 알 수 있는 귀중한 資料이고, 『義巖碑記』는, 비록 於于 유몽인의『於于野談』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인용했지만, 義妓 論介의 사적을 儒林들의 공인을 거쳐 碑文으로 만들어 세상에 알렸다는 데,歷史的인 큰 의의가 있다 할 수 있다.『義相臺重修記』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버린 咸安郡 眉山(미산) 속에 있던 신라 고찰 義相臺의 역사와 가람배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明庵傳』은 명암의 자서전으로, 명나라 문화를 그리워하며 고뇌에 찬 생애를 보내던 명암의 精神的 軌跡(궤적)을 알아 볼 수 있는 자료이다.『臥龍庵上梁文』은 諸葛亮을 欽慕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름을 와룡암이라 붙이고, 그 이름을 붙이게 된 동기와 그 의미, 집 주변의 산수와 집의 구도 등에 대해서 묘사한 글이다.
2. 時世界
명암은 일생 동안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修身과 讀書를 하면서 틈나는 대로 자신의 感懷와 울분을 붙인 詩를 많이 지었다. 명암은 천성적으로 시인의 자질을 타고났고, 또 시를 매우 사랑하였다. 산수 유람하러 가는 짐 속에 늘 唐詩集이 들어 있을 정도였다.
명암은 山水를 많이 유람했는데, 그 때마다 산수의 風光과 자신의 감회를 읊은 많은 시를 남겼다. 본래는 수천 수의 시를 남겼다고 했지만, 지금 명암집에 실려 있는 시는 모두 547題 653수 뿐이다. 명암의 시는 여러 가지 詩體(시체)에 두루 걸쳐 있어, 내용적으로는 물론이고, 형식적으로도 다양하다.
明庵의 詩는 크게, 자신의 靈魂世界를 읊은 詩, 憂國憐民(우국연민)의 詩, 많은 여행을 통해서 본 산수자연을 읊은 詩, 사물을 읊은 詩 등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는 문화의 典範이라 할 수 있는 명나라의 멸망에 대한 허탈감을 느끼면서 청나라가 中原天下를 차지한 것에 대해서는 심한 恥辱感을 느끼며 살았다. 자신의 존재는 명나라 문화의 존속이라는 자부심 내지는 使命感을 갖고서, 명나라의 회복을 주야로 懇望(간망)하였다.
1) 情神世界를 읊은 詩
명암의 많은 시 가운데서도 그의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담은 정신세계를 반영하여 담은 시가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답하여』라는 시는, 명암의 일생의 생활태도를 표방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세속 따르면 사람들 誹謗 없어질 거라 말하지만, 人言從俗衆誚無
이렇게 하는 말은 모르는 말이라고 나는 답한다네. 答謂斯言不識吾
富貴와 功名일랑 모두 다 끊어버렸는데, 富貴功名都謝了
다시 무슨 일을 구하려고 사람들에게 아첨하겠는가? 更求何事向人諛
그 당시 청나라 세상이라 하여 과거도 포기하고 초야에 묻혀서 艱苦(간고)를 자초하여 살아 가는 명암의 처세방식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말이 없지 않았고 개중에는“평범하게 살 것이지 그렇게 유별나게 살 것이 있느냐?”고 하는 知舊(지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명암은“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말”이라고 했다. 부귀와 공명을 다 초월하고서 살아가는데, 누구에게 아첨할 필요도 없고, 또 누구의 비방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아들 상협 상문 상화 등에게 보이는 시」라는 제목의 시는 이러하다.
(1)
孔孟雖云遠(공맹수운원) 孔子 孟子 비록 시대적으로 멀지만,
書存道不亡(서존도불망) 그 분들의 책 남아 있으니 道 없어지지 않아.
苟居眞樂處(구거진락처) 만약, 참된 즐거움이 있는 곳에 살게 되면,
房內有仙鄕(방내유선향) 자기 방안이 곧 신선 사는 곳이 될 수 있다네.
道可求之得(도가구지득) 道는 구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인데,
求之見未嘗(구지견미상) 道 구하는 사람 일찍이 본 적 없어.
寄言豪傑士(기언호걸사) 호걸(豪傑)같은 선비에게 말 부치노니,
何必待文王(하필대문왕) 어찌 꼭 문왕(文王)을 기다리랴?
※ 문왕(文王) : 周나라의 훌륭한 임금, 여기 뜻은 豪傑다운 선비가 나와서 중국을 회복하면 되지 꼭 文王같은 임금이 나와서 호걸들을 규합해야만 중국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
(2)
明月夜光璧(명월야광벽) 명월주(明月珠)나 야광주(夜光珠) 같은 구슬은,
人非不寶藏(인비불보장) 보배로 여겨 간직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네.
惜哉千載下(석재천재하) 애석하도다! 천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는,
※ 천재(千載) : 천세(千歲), 천년 세월
遺棄在康莊(유기재강장) 사통팔달(四通八達) 큰 거리에 갖다 버리네.
※ 유기(遺棄) : 내버리고 돌아보지 않음
一指伸難屈(일지신난굴) 손가락 하나 폈다 굽혀지지 않으면,
心誠必問醫(심성필문의) 정성 다해서 반드시 의원(醫員) 묻는다네.
全身失性理(전신실성리) 온 몸이 본성(本性)의 이치를 잃었는데도,
笑矣不求治(소의부구치) 웃으면서 치료할 길을 구하지 않는다네.
사람이 살아갈 바른 道를 孔子 孟子 등 옛 성현들이 다 책에 남겨 두었고, 이 도를 따라 살면 세상이 樂園이 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인 부귀영화만 추구 하고 도는 추구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보고 개탄하였다. 孟子가 말하 기를,“약손가락이 구부러져 펴지지 않으면 아프거나 일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아도, 그 것을 고치기 위해서 아무리 먼 길이라도 의원을 찾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나쁜 것을 고치려고 하지 않으니, 가치의 경중을 모른다”라고 했다. 이 시에서는 맹자의 이 말을 인용한 것인데, 용모에 조금의 이상만 있어도 그 것을 고치려고 정성을 다해서 의원에게 묻지만, 자기의 心性에 문제가 있어 타고난 것을 다 잃고서도 고치려고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일갈을 가하고 있다.
文王은 周나라의 훌륭한 임금이다. 여기서의 뜻은, 호걸다운 선비가 나와서 中國을 회복하 면 되지, 꼭 문왕 같은 임금이 나와서 호걸들을 규합해야만 중국을 회복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민간에서 호걸이 나와서 청나라를 축출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臥龍菴에서 되는 대로 쓴 시」는, 명나라의 문화를 지키려는 그의 정신을 볼 수 있다.
한 선비가 하늘과 다툰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曾聞一士與天爭
하늘은 높고 높아도 정성에 감응한다네. 天蓋高高赤感誠
명암 늙은이를 한낱 선비로 보지 마소서. 莫以明翁看一介
명암 늙은이 죽지 않아야 명나라 망하지 않는다네. 明翁不死不亡明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한낱 文弱한 선비로 보는 것에 明庵은 동의하지 않고, 중국에서 없어진 명나라의 명백을 자신이 傳承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에서 천하가 다 淸나라 천하가 되고, 조선도 그 영향권 안에 들어갔지만, 자신만은 청나라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굳센 다짐이 들어 있다.
「우연히 읊어」라는 시에서, 초야에 묻혀 생활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野人의 몸이 라 하여 자신만의 정신적 안일을 추구한 것은 전혀 아니고, 세상의 綱常과 中原의 회복을 잊은 적이 없었다. 儒敎를 배워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憂患意識(우환 의식)이 詩 속에 깊게 배어 있다.
물 흐르고 구름 낀 곳에 가족 이끌고 자취 감추어, 挈家遯迹水雲傍
저녁 낚시에서 돌아와 초당에서 잠잔다네. 夕釣歸來睡草堂
내 한 평생 동안 천하의 일을 보아 왔거늘, 看取百年天下事
이 마음만이 오직 綱常을 보전하려 할 뿐. 此心惟欲保綱常
누런 기장 밥 배불리 먹고 옛날 책 읽다가, 飽喫黃粱讀古書
앞 호수 물안개 달빛 속에서 낚시한다네. 一芉烟月釣前湖
가만히 인간세상의 일 점검해 보았더니, 黙然點檢人間事
분명히 지극한 즐거움이 이 밖에 더 없네. 至樂分明此外無
북쪽으로 중국 땅 바라보니 눈물이 줄줄 神州北望涕潸潸
백년 동안의 깊은 원수 아픔이 가시지 않아 百載深讐痛未剛
만고의 綱常은 마땅히 스스로 지켜야지, 萬古綱常宜自保
맑은 氣風 어찌 꼭 西山에 양보하랴? 淸風何必讓西山
西山은 伯夷叔齊가 周나라 곡식 먹기를 부끄러워하여 숨었던 首陽山이다. 명암 자신의 맑은 志節은 伯夷叔齊에 못하지 않다는 자부심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다. 한 평생을 살면서 참된 학문을 계승해가지 못하면서 세월만 보내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여「周易을 읽고서」라는 이런 詩를 남겼다. 세상 이치는 다 순환하는데 학문은 옛날만 못하고 자신이 이런 학문의 수준을 높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사라졌다 자라나고 갔다가 돌아오는 한 가지 이치, 一理消長往復還
달은 거울처럼 가득했다가 또 활처럼 되누나. 月盈如鏡又如彎
千秋에 학문이 끊어져 이을 사람 없는데, 千秋絶學無人繼
어렴풋한 사이에서 어정어정하니 스스로 부끄럽네. 自愧優游影響間
性理學의 要諦인 理와 氣의 본질과 양자간의 관계에 대해서, 역대로 많은 학자들이 궁구 하여 많은 학설을 내놓았다. 명암은 이와 기의 관계를 명료하게 이해하여 칠언절구 한 편으로 요약해 내었다. 그의 「理氣를 두고 읊어」라는 시는 이러하다.
하나의 理가 만 가지 변화의 근원이라, 一理初爲萬化原
氣가 거기서부터 형체가 생겨난다네. 氣隨那裏始形存
이 세상에는 이 理 없는 사물은 없나니, 世間無物無斯理
이 理는 응당 고요한 곳에서 보아야 한다네. 斯理應從靜處看
2) 憂國憐民(우국연민)의 詩
명암은 평생 단 한번도 벼슬에 나가 본 적이 없어 초야에 묻혀 지냈지만, 세상을 등지고 혼자 자기 몸만 깨끗이 간직하려는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고, 언제나 명나라를 회복하여 이상적인 文明의 세계를 회복하는 것이 그 꿈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 다 해도, 잠시도 국가민족의 운명과 백성들의 생활상에 대해서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명암의 걱정은 다른 지식인의 걱정과는 다르다. 오로지 오랑캐 세상을 종식시키고 수준 있는 문명을 가진 明나라를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명암은 林慶業 장군이 명나라를 부흥시키려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신들의 손에 억울하게 죽은 사연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林慶業將軍傳을 읽고서」라는 詩를 지어서, 林慶業장군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동시에 명암 자신의 포부가 이루어지지 못한 슬픔을 거기에 복합시켰다.
장군이 분을 내어 일어나 쇠 창을 잡고서, 將軍憤起把金戈
영웅의 마음 감추고서 바다를 건너갔네. 韜晦雄心越海波
그 당시 한 손으로 해와 달을 붙잡았고, 雙手當年扶日月
만리 외로운 자취 조국 산하 때문에 울었네. 孤蹤萬里泣山河
사람 떠나고 일 어긋나 탄식해도 미칠 수 없고, 人離事去嗟無及
운수 다하고 하늘이 망치니 어떻게 하겠는가? 運訖天亡可奈何
부질없이 남아 肝膽(간담) 찢어지게 만드니, 空使男兒肝膽裂
한 차례 읊조리고서 슬픈 노래 부른다네. 一回吟罷一悲歌
몸은 불행히도 어지러운 때에 태어났으니, 不幸身當板蕩秋
장군은 우리 나라만 위해 근심한 것이 아니었네. 將軍非但爲東憂
우주 사이에서 明나라 王業 회복하려 했고, 圚恢宇宙皇明業
이 山河에 느끼는 늙은이 부끄러움 씻으려 했네. 欲洗山河老父羞
한평생 장한 뜻 칼 한 자루에 간직해 두고서, 壯志百年裝一劍
만리 너른 물결에 외로운 배 저었다네. 滄波萬里棹孤舟
기발한 계획 결국 간사한 중(*) 때문에 잘못되니, 奇謀竟作奸僧誤
천하에 어떤 사람이 눈물 흘리지 않으리오? 天下何人淚不流
장군이 바다 모퉁이에서 우는 모습 홀로 보고서, 獨見將軍泣海陬
南朝(*)의 호걸들 어찌 부끄러움 없었으랴? 南朝豪傑豈無羞
장차 社稷을 다시 회복하려 대책을 갖고서, 爲將社稷重恢策
만리 길 떠날 배의 구름 같은 돛 바로 달았다오. 直掛雲帆萬里舟
천지간에 은혜 잊은 사람들 보고 肝膽 노했고, 天地忘恩肝膽怒
山河 되찾으려 맹세하니 해와 별도 걱정했네. 山河有誓日星愁
어떻게 하다 영웅이 계획한 일 한번에 그르쳐 가지고 如何一誤英雄事
북쪽 오랑캐를 죽여 그 머리를 장대에 걸지 못했나? 未梟當年北虜頭
주) 간사한 중 : 당시 임경업을 도와 중국을 왕래하던 獨步(독보)라는 승려가 있었다. 임경업이 중국에서 배를 준비하라고 시켰으나, 배를 준비하지 않아 임경업이 체포되게 되었다.
주) 南朝 : 北京에서 南京으로 옮겨온 명나라 부흥왕조인 南朝 조정
오랑캐 나라 청나라를 축출하고 명나라를 회복하여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중국의 문화를 회복해야 한다는 명암의 생각과, 丙子胡亂 직후 청나라에 저항하여 망해 가는 명나라를 도와 일으키려고 노력했던 林慶業장군의 생각은 일치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신들의 모함으로 처형된 林慶業장군의 일생을 슬퍼하였다. 林慶業장군이 처형된 뒤에 많은 慷慨(강개)한 문인들이「임경업장군전」을 지어 그의 못 이룬 뜻을 아쉬워하였다. 文弱한 측면이 있는 문인들은 뜻은 있어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을 때, 임경업장군이 대신 명나라 부흥을 위해서 활약해 주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아주 豪快(호쾌)하게 여겼을 것이다. 명암은 자기 시대에 임경업장군 같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 였다. 명암이 살았던 시대, 특히 肅宗 景宗 英祖 연간에는 黨爭이 더욱 격렬하게 되고, 黜陟(출척)이 빈번하였다. 오랑캐의 속박을 벗어나려는 생각은 전혀 없이, 조정의 관원들은 자기 당파의 利權을 위해서 黨爭으로 날을 지새우면서 나라 일을 置之度外(취지도외)하였 다. 명암은 당쟁의 폐해를 걱정하며「朋黨이 일어난 지 .....」라는 이런 시를 지었다.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그 형세 마치 숯불과 얼음 같아, 其勢難容若炭氷
是非를 빚어내어 실타래처럼 어지럽게 되었네. 釀成是非亂如繩
벼슬이 바다에 삿대 위태로워도 물러나는 사람 없으니, 危檀宦海無人退
백 자나 되는 風浪이 또 한 번 닥쳐오겠구나. 百尺風瀾又一層
3) 山水自然을 읊은 詩
明庵은 金剛山 妙香山 등 우리 나라의 이름난 산은 거의 다 登覽(등람)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산수를 유람할 때마다 상세한 遊錄(유록)을 남겼고, 또 많은 시도 남겼다. 산수를 읊은 시는 양적으로도 매우 풍성하다. 여러 차례의 여행에서 얻은 시는 金剛山, 智異山, 伽 倻山 등이 다 들어 있어, 遊山詩로 專集을 내어도 될 정도이다.
집에 앉아서 상상으로 지은 시가 아니고 직접 辛苦(신고)한 발걸음을 옮기며 먼 거리를 여행한 체험에 바탕을 두고 지은 시이기 때문에 現場感이 있고, 繪畵性(회화성)이 강하다. 「천왕봉에 올라」라는 詩는 이러하다.
웅장하게 동해 바다를 누르니 맑은 기운이 무르녹고, 雄壓東溟淑氣融
바위 걸치고 돌 쌓아 귀신의 솜씨를 극도로 발휘했네. 架嵒築石極神工
우뚝이 머리로 푸른 하늘을 이고 서서, 屹然頭載靑天立
천 년 동안 비와 눈에도 그 모습 변하지 않았네. 雨雪天年不變容
멀리 맑은 기운이 엉킨 동해 바다까지 누르는 지리산 천왕봉의 웅장한 자태를 묘사하였고, 돌과 바위로 엉켜 쌓아진 그 모습은 신의 솜씨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의 비바람 눈보라에도 변치 않는 天王峯의 모습을 부각시켰는데, 여기서 선비의 節操나 자세를 비유했다고 볼 수 있다. 南冥의「題德山溪亭柱」에서“어떻게 하면 頭流山처럼 하늘 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라는 구절과 그 정신이 상통하고 있다고 하겠다. 「雪嶽山」이라는 詩는 이러하다.
岳勢雄盤大海隈(악세웅반대해외) 큰 바다 모퉁이에 산악의 기세 웅장하게 서려 있고,
※ 외(隈) : 물굽이, 모퉁이
金蓉千朶絶塵埃(금용천타절진애) 금으로 된 연꽃 천송이 속세 티끌과 먼지 멀리 했네.
※ 타(朶) : 나뭇가지, 애(埃) : 티끌
尖峰何處將飛去(첨봉하처장비거) 뽀족한 봉우리는 장차 어디로 날아 가려는지?
※ 첨봉(尖峰) : 뾰족한 봉우리, 장(將) : 장차
危石分明欲墮來(위석분명욕타래) 위태로운 돌은 분명히 떨어져 내리려 하누나.
※ 타(墮) : 떨어지다
瀉壑淸泉爭噴玉(사학청천쟁분옥) 골짜기에 쏟아지는 맑은 샘물 다투어 옥을 뿜고,
※ 사(瀉) : 쏟아지다, 학(壑) : 골짜기, 분(噴) : 뿜다
落天流瀑却喧雷(낙천류폭각훤뢰)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우레처럼 울부짖네.
※ 각(却) : 물리치다, 훤(喧) : 지껄이다
白雲一半藏眞面(백운일반장진면) 흰구름이 반쯤 진면목을 가렸는데,
※ 장(藏) : 감추다 , 진면(眞面) : 진면목(眞面目)
無乃羣仙向客猜(무내군선향객시) 신선들이 나그네에게 시기(猜忌)하는 것이 아닌지.
※ 군(羣) : 무리, 시(猜) : 猜忌의 뜻, 남의 부러움을 싫어하는 것
햇빛을 받아 반사된 설악산 群峰(군봉)을 금빛 연꽃에 비유하였다. 설악산의 웅장하면서도 險峻(험준)한 돌로 된 봉우리의 자태와 쏟아져 내리는 맑은 폭포를 생동감 있게 잘 묘사 하였다. 설악산이 구름에 반쯤 가려진 것을 두고, 신선들이 속세의 나그네가 구경하는 것을 시기해서 그런 것이라고 기발하게 착상하여 시의 의미에 변화를 주었다.「黃柳나무를 지나 며」라는 제목의 시는 두 수가 있는데, 동일한 시기에 지은 것이 아니고, 한 편은 젊은 시절에 지은 것으로 봄 경치를 묘사한 것이고, 다른 한 편은 만년에 지은 것으로 가을 경치 묘사한 것이다.
화사한 햇살에 맑은 호수요 꽃은 둑에 가득, 麗日淸湖花滿堤
둑 가의 향그런 풀 나귀 발굽에 밟히누나. 堤邊芳草入驪蹄
긴 들판 아늑하고 봄바람은 따사로운데, 長郊漠漠東風暖
문뜩 꾀꼬리가 오르내리며 우는구나. 忽有鶬鶊上下啼
물안개 낀 萬頃蒼波 넓디넓은데, 烟波萬頃瀾
외로운 一葉片舟 더니 가누나. 一葉孤舟遲
기러기 떼 비스듬히 내려앉은 곳에, 雁陣斜斜外
저녁 노을 수 많은 봉우리에 비췰 때라. 千峯落照時
동일한 곳의 경치를 읊은 두 수의 시는 두 폭의 그림과 같다. 그러나 봄의 경치를 읊은 시는, 화려하면서도 생동적이다. 천지 운행의 큰 조화 속에서 만물이 자기의 역할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을을 읊은 시는, 靜的인 여유 속에서 모든 것이 收斂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같은 곳을 이렇게 계절의 변화의 특징을 잘 잡아 묘사했는데, 시 가운데 인생이나 우주 운행의 원리마저 느껴진다.
4) 事物을 읊은 詩
명암은 사물의 이치를 窮究하는 학자의 자세로 일생을 살았기에 사물을 보는 관찰력도 아주 예리했다. 그래서 그의 詠物詩는 과학자의 자연관찰처럼 정밀하다.「뜰의 매화」라는 시에서 사물의 屬性을 시로 나타내는 명암의 솜씨를 알 수 있다.
江城(*)의 봄비가 밤에 흩날릴 때, 江城春雨夜霏微
일찍 피는 매화 눈처럼 가지에 가득하네. 忽見寒梅雪滿枝
사물의 본성은 시절의 모양 따라 얇지 않아, 物性不隨時態簿
草堂으로 다시 돌아오니 옛날 모습이네. 草堂重返舊年姿
주)江城 : 丹城의 別稱
이른 봄, 보슬비 내리는 속에서 가지 가득히 핀 매화를 보고서, 세태에 따라 자기의 지조를 바꾸지 않고 자기의 길을 묵묵히 가는 선비의 氣像을 복합시켰다.
「대나무」라는 詩는 이러하다.
그윽하게 사는 隱者가 보기에 꼭 합당하나니, 政合幽居隱者看
처마 가득히 살랑거리는 소리 번거로와도 싫지 않아. 滿簷疎韻不嫌繁
야윈 줄기는 風霜의 괴로움을 실컷 겪었고, 瘦莖任飽風霜苦
굳센 마디는 눈이나 달빛의 차가움 견뎌 왔도다. 勁節能堪雪月寒
이리저리 난 빽빽한 잎은 봉황이 잠자기 알맞고, 密葉參差宜鳳睡
꾸불꾸불한 외로운 뿌리는 용이 서린 것 배웠도다. 孤根屈曲學龍蟠
한가할 때면 하늘하늘하는 푸르런 대나무 베어내어, 閑來欲剪猗猗翠
그 당시 渭水 여울에서 다시 낚시나 할까. 更釣當年渭水湍
대나무의 특징을 하나도 빠뜨림 없이 묘사해 내었다. 시각적으로 가는 줄기, 굳은 마디, 빽빽한 잎, 굽은 뿌리를 묘사하였고, 청각적으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의 소리도 아울러 묘사하였고, 맨 첫 구에서 종합적으로 대나무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묘사해 내었다. 渭水 가에서 낚시하던 사람은 姜太公이다. 비록 낚시로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周나라 武王의 발탁으로 주나라를 天子나라로 만드는데 큰 공훈을 세운 이물이다. 명암 자신도 초야에 묻혀 지내지만, 강태공처럼 經綸을 갖고서 세상을 구제할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연꽃」이라는 시는 이러하다.
짙붉은 데다 살며시 하얗고 깨끗하여 물안개와 어우러져, 深紅微白澹和烟
훤칠한 눈 같은 연꽃은 열 길이나 이어져 있구나. 雪藕亭亭十丈連
바람이 푸른 연잎 흔드니 기울어졌다 다시 바로 서고, 風搖翠蓋欹還正
빗방울 夜明珠처럼 흩어져 부숴졌다 둥글어지네. 雨散明珠碎却圓
푸르런 빛이 차가운 물결에 비취어 아주 깨끗하고, 淸倒寒波看濯濯
고요함이 빈 달에 이르니 사랑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네. 靜臨虛月愛姸姸
사랑스럽도다. 濂溪노인 간 천년 뒤에는, 可憐千載濂翁後
누가 남은 향기를 가져갈 지 아직도 뚜렷하네. 誰取餘香尙宛然
붉은 빛과 흰 빛이 섞인 연꽃이 안개와 조화를 이루고 있고, 흰 연 줄기는 우뚝하게 솓아 있다. 푸른 일산 같은 연잎은 바람을 받아 기울었다가 바로 서고 한다. 빗방울이 연잎 위에 내리는 순간 비가 퉁기었다가 금새 모여서 구슬을 이룬다. 그리고 연꽃과 연못의 물과 달이 어울려서 한폭의 정물화를 이룬다. 周濂溪가「愛蓮說」을 지어 연꽃의 특징을 너무나 잘 묘사하였기에, 그 이후로 연꽃을 두고 쓴 詩文이 드물다고 할 정도다. 명암의 이 시는「애 련설」의 내용과 거의 중복되는 것이 없다. 주렴계가 미처 언급하지 못한 점을 관찰하여 시로 나타내었다. 명암의 관찰이 정확하고 묘사 능력이 아주 섬세함을 이 시에서 증명할 수 있다. 명암의 시 가운데 대표적이라 생각되는 몇 수를 들어 명암의 時世界를 개괄적으로 소개하였다. 明庵集의 반 이상이 시이고, 시 가운데는 珠玉같은 우수한 작품이 많아, 주제별 로 深化시켜 연구할 필요가 있다.
3. 遊山錄
옛날부터 학자나 문인들은 산을 많이 찾았다. 孟子의 말에“孔子께서 東山에 올라서 魯나 라를 작게 여기셨고, 泰山에 올라서는 天下를 작게 여기셨다”라고 했다. 높은 산에 오르면 대장부의 浩然之氣를 펼 수 있고, 또 천하를 굽어보면서 자신의 포부를 펼쳐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산천의 기운을 흡수하여 詩文의 氣를 북돋울 수 있는 것이다. 千古의 명저 「史記」를 저술한 司馬遷이 젊은 시절 名山大川을 두루 유람하여 명문장가가 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또 산의 흔들리지 않은 莊重(장중)한 자세를 배워 자기 지조를 지키는 선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보다도 등산은 공부하는 것과 그 과정과 원리가 비슷하다. 높은 산에 오르려면 몸은 힘이 들지만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보이는 시야는 넓고 정확 하듯이, 공부도 하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지만, 그만큼 識見이 높아진다.
또 올라가기는 어렵고 내려가기는 쉬운 것도 공부와 같다. 또 옛날 분들은 단순히 등산을 위해서 산을 찾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산을 스승으로 삼아 자신을 수양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孔子 이후로, 司馬遷, 李白, 杜甫, 韓愈, 朱子 等 많은 학자 문 인들이 산을 찾았다. 우리나라 선비들 가운데서도 조선 전기의 梅月堂 金時習, 秋江 南孝溫, 佔畢齋 金宗直, 濯纓(탁영) 金馹孫 등 많은 분들이 산을 찾았다. 명암의 傍祖가 되는 虛庵 鄭希良도 산을 좋아한 사람 가운데 한 분이다.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인 退溪 李滉, 南冥 曺植 등도 산을 즐겨 찾고 산을 유람한 뒤에 詩나 유산록을 남겼다. 조선 후기에는 眉叟(미수) 許穆(허목), 三淵(삼연) 金昌翕(김창흡) 등이 산을 즐겨 찾았다. 명암은 우리 나라 선비들 가운데서 가장 산을 좋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명암은 여행할 때면 대부분 여행기록을 남겼다. 현재「명암집」에는 關東錄, 靑鶴洞錄, 頭流錄, 伽倻山錄, 錦山 錄, 月出山錄 등 여섯 편의 유산록이 실려 있다. 관동록 속에 金剛山, 雪嶽山, 吐含山에 유람한 기록이 들어 있다. 명암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妙香山, 太白山, 小白山, 五臺山, 俗離山, 天冠山 등도 유람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산에서 쓴 유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이 여섯 편의 유산록은 명암 자신의 여행기록일 뿐만 아니라, 역사지리에 관한 중요한 자료 이다. 명암이 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 자연환경, 생태, 없어지거나 파괴.변형된 古墳과 건물, 도로상황 등등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金剛山의 隱仙臺와 萬瀑 洞의 경치를 적은 글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描寫와 比喩가 逼眞(핍진)하여 경치가 눈앞에 재현되는 듯하다.
隱仙臺가 있는 뾰족한 바위로 뿔 모양의 돌이 십이 층으로 되어 있고, 폭포가 구름 끝에서 떨어지 는데, 그 형세는 마치 공중에 달려 있는 듯하다. 이 곳이 금강산의 제일 가는 경치이다. 萬瀑洞의 물 이 다투어 흐르는 가운데서도 九龍淵은 더욱 기이하면서도 웅장하다.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이 그 물줄기의 근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무지개가 거꾸로 드리우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어두운데, 세찬 물이 내뿜어 구슬이 깨어지고 옥이 부숴지니, 그 소리는 마치 우레가 노하여 싸우는 듯하다. 마음이 흔들리고 눈이 흐릿하고 정신이 두려워졌다. 만이천 봉우리와 만폭동 흐르는 물을 어찌 다 기록하리오.
金剛山 가는 길에 慶州를 경유하였는데, 당시 慶州의 신라 유적은 폐허가 된 채로 있는 광경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검소하게 살지 않고 큰 궁궐과 절을 짓느라고 백성들을 강제로 부역시킨 신라지배층에 대해서 諷刺(풍자)를 잊지 않았다.
경주에 들어가니, 반월성 옛 서울의 묵은 자취가 눈에 慘憺(참담)하고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 무너진 궁궐터와 폐허가 된 절을 보니, 산의 줄기를 깍아 고르느라 백성들의 힘을 많이 썼다. 옛날 堯(요)임금은 천자이면서도 남가새(*)로 인 집에 흙 계단의 궁궐에서 산 정신을 왜 본받으려고 하지 않는가? 新羅의 왕들 때문에 千古를 향해서 한번 웃는다. 토함산에 들어가니, 이른 바 骨窟(골굴) 이라는 것이 있는데 제일가는 명승지였다. 이 날 밤에는 바위 문에서 밝은 달을 벗삼아 있으려니, 마음이 아련하여 인간세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주) 남가새 : 지붕의 짚 대신에 사용한 한해살이 풀이다.
지리산 佛日庵, 佛日瀑布와 靑鶴洞의 경치를 삼세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불일폭포의 물이 세차게 흘러 내리는 모습을 눈앞에 재현시키는 듯 묘사가 뛰어나다.
佛日庵에 들어갔다. 한 줄기 길이 푸른 절벽에 걸려 있었다. 절벽에 길이 없어지면 나무에 걸터 앉아 사다리처럼 해서 올라갔는데, 그 아래는 만 길이나 되니, 정신이 아찔하였다.
암자의 좌우는 위로 우뚝 솟아 마치 달려 있는 듯했다. 앞에는 두 봉우리가 만 길 높이로 깍아지른 듯 서 있었는데, 오른 쪽은 毘盧峯이요, 왼쪽은 香爐峯이었다. 옛날에 푸른 학과 흰 학이 바위 틈에 깃들어 살았으므로, 혹은 靑鶴峯 白鶴峯이라고 하는 것이다. 봉우리 위로부터 폭포가 나는 듯이 천길 아래로 떨어지는데 상하 이층으로 되어 있었다. 맑은 날에도 안개가 골짜기에 가득하고, 바람과 우레 가 절로 일어났다. 폭포에서 떨어져 내린 물이 고여서 못이 된 것이 이른바 鶴淵이었다. 중이 말하기 를,“용이 그 아래에 잠겨 있는 데, 때로 나옵니다. 雲淵의 절벽표면에‘三仙洞’이라는 세 글자가 있는데,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의 글씨인지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왼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翫瀑臺(완폭대), 세 글자가 쓰여져 있었는데, 孤雲 崔致遠의 글씨였다. 한참 동안 그 곳을 돌아 다니니 마치 술병 속 같은 별다른 세계고 이 세상 바깥의 뛰어난 경치였다.
이 밖에 關東八景, 金剛山, 智異山, 伽倻山, 月出山, 錦山 등 우리나라 주요 관광자원에 대한 상세한 역사적 자료를 내포하고 있어 기행문학으로서 뿐만 아니라, 당시의 역사지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 전국 각지를 두루 유람하면서 名勝地에는 刻字를 남겼는 데, 하동 洗耳巖, 합천 紅流洞, 남해 菩提庵, 설악산 계조암, 거창 搜勝臺와 대원계곡, 함안 義相臺 등에는‘堂號와 姓名’을 삼장 내원사 장군바위에는‘明翁臺’와‘萬花潭’刻字를 남겼다.
* 명옹대 刻字
Ⅳ. 결론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통치하고 있던 시대에 태어나 살았던 명암은, 名利를 초탈하여 명나라의 회복과 청나라의 축출을 염원하면서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서, 出處의 大節을 지켜 곧게 깨끗하게 艱苦(간고)한 삶을 영위하였다. 오랑캐에게 朝貢을 바치는 朝廷에서는 구차하게 벼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고민 하지 않아도 좋을 문제였지만, 그는 선비 지식인으로서 국가의 운명에 무관심 할 수 없었던 것이다. 伯夷叔齊 이래로 이어져 온 선비의 節義사상이 이 시대상황에서 명암을 통해 體現(체현)된 것이었다. 그의 시는 淸淨하고 眞率한 肺腑(폐부)에서 흘러나온 것이기에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詩想이 다채롭고 진지하고, 표현의 기법도 독창적 이라 이전의 시를 답습한 것이 아니고, 아주 逼眞(핍진)하게 사물을 묘사하였다.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섬세하여 그의 시는 내용적으로 뿐만 아니라 文藝的으로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산문 가운데는「矗石樓重修記」,「義巖碑記」등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글이 있지만, 文學的으로 가장 뛰어난 글은 여러 종류의 遊山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산 록은 산수문학의 典範(전범)으로서 韓國漢文學史에 도입하고 새롭게 照明받아야 한다.
* 촉석루중수기(1725년)
□ 附錄 : 明庵 鄭栻 主要 漢詩 飜譯 및 해석
◯登 天王峰(등 천왕봉) 『천왕봉(天王峰)에 올라』
自從開闢隔人烟(자종개벽격인연) 천지가 열린 뒤로 세속의 연기와 떨어져서,
註) 격(隔) : 사이가 뜨다
特立雄盤碧海前(특립웅반벽해전) 푸른 바다를 앞으로 펼치고서 우뚝 솟았네.
註) 반(盤) : 소반, 쟁반 /벽(碧) : 푸르다, 푸른 빛
矗峀入雲曦馭側(촉수입운희어측) 높은 봉우리는 구름에 들어가 해에 가깝고,
註) 수(峀) : 산골 /희(曦) : 햇빛 /어(馭) : ∼을 타다 /측(側) : 옆
老巖排壑斗墟懸(노암배학두허현) 골짜기 오래된 바위는 높은 곳에 달려 있는 듯,
註) 학(壑) : 골짜기 /허(墟) : 험한 /현(縣) : 매달다
身超宇宙山河上(신초우주산하상) 내 몸은 우주(宇宙)속의 산하(山河)를 초월하였고,
自極扶桑日月邊(자극부상일월변) 내 눈은 부상(扶桑)의 해와 달까지 다 볼 수 있네.
註) 부상(扶桑) : 동해 바다속의 해가 걸려 있다가 뜨는 뽕나무
四海無窮看不盡(사해무궁간부진) 다함없는 사해(四海)는 다 볼 수 없는데,
註) 사해(四海) : 사방의 바다
一團天勢接茫然(일단천세접망연) 한 덩어리 하늘의 기운 아득한 데 닿아 있구나.
註) 망(茫) : 아득할 망
◯ 憶 大明(억 대명) 『큰 명나라를 생각하며』
天下今無帝冑眞(천하금무제주진) 지금 천하에 참된 황제(皇帝)의 자손 없나니,
註) 주(冑) : 자손
百年非是舊王春(백년비시구왕춘) 청(淸)나라 들어선 이후로 옛날 세월 아니라네.
可憐白首烟霞客(가련백수연하객) 가련타! 허연 머리 하고서 산의 놀 속에 사는 사람.
痛結山河涕滿巾(통결산하체만건) 슬픔은 산하에 맺혀 있고 눈물 두건에 가득하네.
◯ 菩提庵(보리암) 『보 리 암』
菩提靈境極淸幽(보리영경극청유) 보리암 신령스런 곳 매우 그윽한데,
註) 보리암(菩提庵) : 남해군 금산면에 있는 암자 이름
居士重來舊跡留(거사중래구적유) 居士가 거듭 와보니 옛 자취 남아 있네.
蓬島雲收溟萬里(봉도운수명만리) 봉래도(蓬萊島)구름 걷히자 바다는 만리나 멀고,
註) 蓬萊島 : 동해바다 가운데 신선들이 산다는 산 이름
蓮臺仙去石千秋(연대선거석천추) 蓮花臺에 신선 떠나고 돌만 천추에 남아 있네.
俯看日月初生處(부간일월초생처) 해와 달이 처음으로 돋는 곳을 굽어보기도 하고,
高臥山河己盡頭(고와산하기진두) 山河 이미 다 끝난 곳에 높다랗게 드러눕는다.
從此塵緣無復在(종차진연무복재) 지금부터 세속의 인연은 다시 있지 않으냐,
百年身世自悠悠(백년신세자유유) 내 한 평생의 신세는 여유롭다네.
◯ 閑居(한거) 『한가하게 살아가면서』
明庵居士謝知音(명암거사사지음) 명암거사는 절친한 친구도 끊었는데,
註) 사(謝) : 양보하다. 감사하다 /지음(知音) : 절친한 친구
案上義書一古琴(안상의서일고금) 책상 위에는 周易과 오래된 거문고 한 대.
註) 의서(義書) : 여기서는 주역(周易)
無喜無悲無語坐(무희무비무어좌) 아무런 기쁨도 슬픔도 없는 채 말없이 않았노라니,
滿庭春草一般心(만정춘초일반심) 뜰 가득한 봄 풀도 나와 한가지 마음이구나.
◯ 偶吟(우음) 『우연히 읊어』
明庵居士淡無營(명암거사담무영) 명암거사는 욕심 없어 도모하는 일 없기에,
不欲時人識姓名(불욕시인식성명) 시속(時俗) 사람들이 이름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다네.
只取春秋三傳讀(지취춘추삼전독) 다만 춘추(春秋)의 삼전(三傳)만 가져다 읽으니,
首陽山色夢中靑(수양산색몽중청) 수양산(首陽山) 산 빛이 꿈속에서 푸르러구나.
◯ 示 相協相鼎相華諸兒(시 상협상정상화제아)
『아들 상협,상정,상화 등에게 보이는 시』
(1)
孔孟雖云遠(공맹수운원) 孔子 孟子 비록 시대적으로 멀지만,
書存道不亡(서존도불망) 그 분들의 책 남아 있으니 道 없어지지 않아.
苟居眞樂處(구거진락처) 만약, 참된 즐거움이 있는 곳에 살게 되면,
房內有仙鄕(방내유선향) 자기 방안이 곧 신선 사는 곳이 될 수 있다네.
道可求之得(도가구지득) 道는 구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인데,
求之見未嘗(구지견미상) 道 구하는 사람 일찍이 본 적 없어.
註) 상(嘗) : 경험하다, 맛보다.
寄言豪傑士(기언호걸사) 호걸(豪傑)같은 선비에게 말 부치노니,
何必待文王(하필대문왕) 어찌 꼭 문왕(文王)을 기다리랴?
註) 文王 : 周나라의 훌륭한 임금, 여기 뜻은 호걸다운 선비가 나와서 중국을 회복하면 되지 꼭 文王같은 임금이 나와서 호걸들을 규합해야만 중국을 회복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뜻
(2)
明月夜光璧(명월야광벽) 명월주(明月珠)나 야광주(夜光珠) 같은 구슬은,
註) 벽(璧) : 구슬
人非不寶藏(인비불보장) 보배로 여겨 간직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네.
惜哉千載下(석재천재하) 애석하도다! 천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는,
註) 천재(千載) : 千歲(천년 세월)
遺棄在康莊(유기재강장) 사통팔달(四通八達) 큰 거리에 갖다 버리네.
註) 유기(遺棄) : 내버리고 돌아보지 않음
一指伸難屈(일지신난굴) 손가락 하나 폈다 굽혀지지 않으면,
心誠必問醫(심성필문의) 정성 다해서 반드시 의원(醫員) 묻는다네.
全身失性理(전신실성리) 온 몸이 본성(本性)의 이치를 잃었는데도,
笑矣不求治(소의부구치) 웃으면서 치료할 길을 구하지 않는다네.
◯ 題 名大源盤石(제 명대원반석)
『대원사(大源寺) 앞의 반석에 이름을 쓴다.』
淸泉白石合仙眞(청천백석합선진) 맑은 샘 하얀 돌 참된 신선에 알맞기에,
故欲留名閱萬春(고욕유명열만춘) 일부러 이름 남겨 만고에 전하고자 한다.
註) 열(閱) : 보다, 검열하다
莫道三千瑤海遠(막도삼천요해원) 삼천리 요지(瑤池) 멀다고 말하지 말게나,
註) 瑤池 : 곤륜산에 있는 신선이 사는 연못 옛날 西王母가 살았던 곳
碧桃花月返風輪(벽도화월반풍륜) 벽도화(碧桃花) 같이 생긴 달 타고 돌아오지.
註) 벽도화(碧桃花) : 먹으면 오래 산다는 천도복숭아, 선녀 西王母가 瑤池에서 한나라 武帝에게 벽도화(碧桃花)를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 륜(輪) : 바퀴
◯夜坐有感(야좌유감) 『밤에 느낌이 있어』
碣石迢迢瀚海深(갈석초초한해심) 갈석산(碣石山) 멀고 멀고 한해(瀚海) 깊고 깊고,
註) 초초(迢迢) : 멀고 멀다 /碣石山 : 중국 하북성에 있는 산 /瀚海 : 몽고의 고비사막
吾皇消息杳于今(오황소식묘우금) 우리 황제(皇帝)의 소식이 지금은 아득해 졌도다.
註) 묘(杳) : 아득하다
靑山夜月鵑啼血(청산야월견제혈) 달 밝은 푸른 산 속에 두견(杜鵑)새 피나게 우니,
註) 견(鵑) : 두견새 /제(啼) : 울다
似識明翁痛哭心(사식명옹통곡심) 明庵 늙은이의 통곡(痛哭)하는 마음을 아는 듯.
◯ 題 武夷精舍壁上(제 무이정사벽상)
『武夷精舍의 벽 위에 쓴 시』
顔四曾三作佩銘(안사증삼작패명) 안자(顔子) 四勿과 증자(曾子) 三省으로 銘을 삼아,
註) 패(佩) : 휴대하다 /四勿 : 예가 아니면 듣지도, 보지도, 말하기도 움직이기도 말라 /三省 : 하루 세 가지를 반성함
鶉衣瓢飮是平生(순의표음시평생) 너덜너덜 떨어진 옷에 변변찮은 음식 먹으며 살아가는 나의 한 평생이라네.
註) 순(鶉) : 메추라기) /표(瓢) : 바가지
殷天日月薇歌咽(은천일미가인) 은(殷)나라 하늘의 해와 달 그려 고사리 캐먹으며 노래하다 목이 메이고,
註) 미(薇) : 고사리 캐먹다 ☞ 伯夷 叔齊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 죽었는데 그가 지은 채미가(採薇歌)가 史記에 실려 전해온다.
晉室柴桑露史明(진실시상노사명) 晉나라가 통치할 때 시상(柴桑)에서 묻혀 지낸 것 歷史에 분명하다네.
註) 시상(柴桑) : 중국 江西省에 있는 땅, 晉나라 陶淵明의 고향, 陶淵明은 벼슬을 버리고 직접 농사지으며 시골에서 지냈다.
百年何似鳥無情(백년하사조무정) 백년토록 어찌하여 새도 情이 없는지?
孤燈昨夜丁寧事(고등작야정령사) 어제 밤 외로운 등불 아래 뚜렸했던 일은,
夢落金剛萬瀑鳴(몽락금강만폭명) 꿈에 金剛山에 우레 같은 만폭동(萬瀑洞) 폭포에 떨어진 것.
◯智異山(지리산) 『지 리 산』
千巖鏡秀白雲中(천암경수백운중) 거울 같은 수많은 바위 힌 구름 속에 빼어나고,
萬疊盤回氣勢雄(만첩반회기세웅) 만 겹 구부려 돌아 기세가 웅장(雄壯)하도다.
流水疑從銀漢落(유수의종은한락) 흘러가는 물은 은하수에서 떨어져 내리는 듯
碧峯應興玉京通(벽봉응흥옥경통) 푸른 봉우리 응당 옥황상제(玉皇上帝) 계신 서울과 통하리,
山名大槪聞天下(산명대개문천하) 대개 이 산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져 있으니,
仙景非徒最海東(선경비도최해동) 선경(仙境)은 해동(海東)에서만 으뜸이 아니라네.
不死靈芝靑滿岸(불사영지청만안) 죽지 않는 영지(靈芝) 푸르럼이 절벽에 가득한데,
昔年何處住秦童(석년하처주진동) 옛날 진(秦)나라 동남동녀(童男童女)들 어디에 있었던가?
註) 童男童女 : 옛 秦始皇이 不老草를 보내기 위해서 童男童女 삼천 명을 동해 바다에 三神山으로 보낸 적이 있다.
◯ 題 名搜勝臺(제 명수승대) 『수승대에 이름을 쓰며』
註) 수승대(搜勝臺) : 안의현(安義縣) 금원산(金猿山)에 있는 자연석으로 된 명승지, 지금은 居昌郡에 속해 있다.
一層靈境勝蓬萊(일층영경승봉래) 한 층의 신비한 경지 蓬萊山보다 낫나니,
萬古仙臺鶴幾廻(만고선대학기회) 萬古의 신선 누대 학은 몇 번이나 돌아왔나?
白石未消開闢雪(백석미소개벽설) 흰 돌은 개벽(開闢)했을 때의 눈이 녹지 않은 것이고,
蒼嵒猶帶混沌苔(창암유대혼돈태) 푸른 바위는 천지 나뉘어지기 전의 이끼 띠고 있네.
溪花亂落無風雨(계화난락무풍우) 시내 가의 꽃들이 어지러이 떨어지니 바람 없는 비요,
洞水奔狂不電雷(동수분광불전뢰) 골짜기 물 미친 듯 달리니 번개 없는 우레 소리로다.
黃葉昔年經過客(황엽석년경과객) 지난 날 노랗게 단풍 들었을 때 지나갔던 나그네가,
暮春今日又尋來(모춘금일우심래) 오늘 이 저물어 가는 봄에 다시 또 찾아 왔다오.
◯ 義巖(의암) 『義巖(義巖碑記 中)』
獨峭其巖 特立其女(독초기암 특립기여) 홀로 가파른 그 바위 우뚝 선 그 여인
註) 초(峭) : 가파르고 험하다.
女非斯巖 焉得死所(여비사암 언득사소) 저 여인, 그 바위 아니면 어디서 죽을 곳을 얻으며
巖非斯女 烏得義聲(암비사여 오득의성) 저 바위, 그 여인 아니면 어찌 의롭단 말 들으리
註) 오(烏) : 까마귀,어찌
一江高巖 萬古芳貞(일강고암 만고방정) 한 줄기 강에 높은 바위 만고에 꽃다 우리라
◯ 雪嶽山(설악산) 『설악산』
岳勢雄盤大海隈(악세웅반대해외) 큰 바다 모퉁이에 산악의 기세 웅장하게 서려 있고,
※ 외(隈) : 물굽이, 모퉁이
金蓉千朶絶塵埃(금용천타절진애) 금으로 된 연꽃 천송이 속세 티끌과 먼지 멀리 했네.
※ 타(朶) : 나뭇가지, 애(埃) : 티끌
尖峰何處將飛去(첨봉하처장비거) 뽀족한 봉우리는 장차 어디로 날아 가려는지?
※ 첨봉(尖峰) : 뾰족한 봉우리, 장(將) : 장차
危石分明欲嶞來(위석분명욕타래) 위태로운 돌은 분명히 떨어져 내리려 하누나.
※ 타(嶞) : 떨어지다
瀉壑淸泉爭噴玉(사학청천쟁분옥) 골짜기에 쏟아지는 맑은 샘물 다투어 옥을 뿜고,
※ 사(瀉) : 쏟아지다, 학(壑) : 골짜기, 분(噴) : 뿜다
落天流瀑却喧雷(낙천류폭각훤뢰)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우레처럼 울부짖네.
※ 각(却) : 물리치다, 훤(喧) : 지껄이다
白雲一半藏眞面(백운일반장진면) 흰구름이 반쯤 진면목을 가렸는데,
※ 장(藏) : 감추다 , 진면(眞面) : 진면목(眞面目)
無乃羣仙向客猜(무내군선향객시) 신선들이 나그네에게 시기(猜忌)하는 것이 아닌지.
※ 군(羣) : 무리, 시(猜) : 猜忌의 뜻, 남의 부러움을 싫어하는 것
◯ 鱸魚臺 偶吟 『鱸魚臺에서 우연히 읊어』
노어대 우음
簞瓢身世與人違(단표신세여인위) 변변찮은 음식 먹고 사는 신세 다른 사람과 다른데,
※ 단표(簞瓢) : 도시락과 표주박, 위(違) : 어긋날, 어기다
只喜門庭絶是非(지희문정절시비) 다만 집앞에 옳니 그르니 하는 소리 끊어진 것 기뻐하노라.
頭白生涯何所有(두백생애하소유) 머리카락이 허옇게 된 생애에 있는 바가 무엇인가?
一竿明月一簑衣(일간명월일사의) 달 밝을 때 도롱이를 입고서 낚싯대를 드리웠다오.
※ 간(竿) : 낚싯대, 사(簑) : 도롱이(짚, 띠 따위로 엮어 허리에 두르는 옷)
※ 노어대(鱸魚臺) : 咸安郡 代山面 낙동강 가에 있는 臺 이름, 명암이 차만(車滿)이라는 어부한테서 샀다
◯ 先君子嘗得一雙梅鶴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키운 한 쌍의 학』
선군자상득일쌍매학
先人愛鶴養多年(선인애학양다년) 아버님께서 학(鶴)을 사랑하여 여러 해를 길렀는데,
白羽玄裳列案前(백우현상열안전) 흰 깃과 검은 치마로 책상 앞에 날개 벌리고 섰지.
※ 우(羽) : 깃, 상(裳) : 치마
叩作靑田飛舞戱(고작청전비무희) 두드려 일으켜 푸른 논에서 날아 춤추게 하고,
※ 고(叩) : 두드리다, 무(舞) : 춤추다 , 희(戱) : 놀이
月明梅塢雪翩翩(월명매오설편편) 매화나무 있는 달 밝은 언덕에서 흰 날개 너울 거렸네.
※ 오(塢) : 둑이나 제방, 편(翩) : 나부끼다
※ 先人 : 아버지 유희(有禧)인데 號는 옥봉(玉峰)이고 字는 경수(景綏)이다.
참고 문헌
1. 鄭文孚, 國譯 農圃集, 海州鄭氏 松山宗中, 1998
2. 鄭栻, 譯註 明庵集 서울 , 와우출판사, 2003
3. 鄭載圭, 老栢軒集
4. 道學과 精忠大節思想(1999, 東北亞傳統文化硏究所·鄭允錫)
5. 明庵 鄭栻先生 追慕詩集(2014, 山淸頭流漢詩會·武夷精舍 儒稧)
【줄거리, 요점 정리】
The Study of MyungamJungsik' Life and Literature |
Jung Tae-jong
(Mui-jung-sa Office)
Jungsik, with the pen name of Meongam, is a literati in the latter period of Chosun dynasty. He has never entered government service. Because he has deeply deplored that Ming dynasty has been collapsed by Qing dynasty. He has regarded that Ming dynasty is an enlightened nation. but, Qing dynasty is barbarian nation. At that period, most of Chosun' Confucianists have regarded Ming dynasty as suzerain nation to Chosun dynasty.
So they couldn't help deploring to the fall of Ming dynasty. Jungsik also was one of that Confuciaists who thinks so. Therefore, in his whole time, ha has tried to rebuild Ming dynasty. Consequently his life has undergone through many hardships, but he has never broken his life principles.
His spirit like this has revealed in his poetries and proses. As his poetry have gushed out from the bottom of his heart, his poetry is fresh and sincere. So the atmosphere of his poetry can make reader move deeply. His techniques of expression is creative and variegated.
And he has written poerty with the vivid description. He has never followed in former poets' footstep. Poetic language that he has command is polished well.
In conclusion, his poetry is excellent not only in contents but also in literary.
Besides, although his prose, for instanse Choksuklu record and Euyam epitaph have been received many readers' attentions. But his best excellent prose is has picnic record. Especially, his picnic record is nice model of scenic beauty, and can be registered on the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in Sino character.
용강공파 종중 및 무이정사 유계 사무국장 정태종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