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늘 감사(感謝)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지난 2018년 5월 5일 (음 3월 20일)
海州鄭氏 여주 성역(聖域)에서
시조 숙(肅) 할아버지와
정도공(貞度公)할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할아버지의
춘향대제(春享大祭)를 봉행한 날
전국에서 300여명이 넘는
많은 종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귀(高貴)한 공적(功績)을 남긴
고인(故人) 2분, 기탁(基鐸대종손)과
선친 채섭(采燮)전 회장과
태수(泰秀)전 회장 3분의 공적비(功績碑)
제막 행사를 성대하게 마련하여
축하 해 주셔 감사한 마음에
눈시울이 붉혀지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공적비 제작에
여러가지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멋진 공적비를 세우기 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추진해 주신
두섭(斗燮) 회장을 비롯한 임원,
시도지회장, 평의원, 대의원,
제막식에 함께 축하 해 주신
모든 종친 분들의 정성과 고마움을
가슴속 깊이 새기면서 늦었지만
지면을 통해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히 팔순의 고령(高齡)에도
궂은일 마다않고 석재(石材)일 도맡아
수차례 석재상을 방문하면서
관리 감독 해 주신 행섭(行燮)전부회장,
3분 공적내용을 자세히 조사하여
공적비문을 완성 해 주신
윤근(允根)부회장께도
재삼 감사드립니다,
선친 채섭(號 晦堂)회장께서
돌아가신지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삶의 큰 굴레에서 보면
짧은 시간일 수 있지만 반복적(反復的)이고
세속적(世俗的)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긴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힘도 기억을 제거할 수 없다.
(by 루즈벨트)”고 한 말처럼
오랜 세월로 쉽게 잊혀 질 뻔 했던
많은 업적(業績)들을 잊지 않고
기억 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데
공적비를 세워 찬양(讚揚) 해 주시니
자식으로서 무엇으로 감사(感謝)해야
할지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사후(死後) 30년 만에
공적을 인정받고 영광(榮光)의 자리가
만들어 졌으니 저승에 계신
선친(先親)께서도 매우 기뻐하시고
흐뭇해 하셨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시대(時代)와 사람에 따라
가치관(價値觀)은 바뀔 수 있지만
회장 재임 시
해주정씨(海州鄭氏)를 위한
뜻과 신념을 가지고 봉사하고
헌신(獻身)한 선친의 숭고(崇高)한
정신(精神)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향기(香氣)로
남을 것 같아 보람을 느낍니다.
초창기 해주정씨 대종친회는
재정(財政)이 빈약(貧弱)하여
회장(會長), 총무(總務), 임원(任員)들이
활동비(活動費)도 자비부담 했고
사무실(事務室)도 없어
음식점과 다방 등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종사를 보기도 했으며 임원들 부담으로
처음 사무실도 임차하는
어려웠던 실정(實情)임에도
숭조돈목(崇祖敦睦)의 정신으로 똘똘 뭉쳐
영구히 존속할 최고의 종친회를 만들겠다는
사명감으로 많은 난관(難關)을
극복하셨습니다.
회장 5選(8-9대,11대-13대)재임 시
정도공 묘역 전부(貞度公 墓域 全部)가
국가(國家)에 수용(收用)되는
海鄭의 대 격변기(大 激變期)를 맞아
탁월한 선견지명과 비전(vision)으로
열정을 쏟아 업무를 추진하셨기에
여주 명산도 求山하여
정도공, 동지공, 해원군 3분 묘소를
이장하고(1984년 11월 25일)
실전(失傳)된 始祖(諱 肅)를 비롯한
上代 6位<少府少尹(휘 언),
贊成公(휘 允珪) 參判公(휘 忠敬),
文學公(휘 允卿) 判書公(휘 允珍)
大將軍公(휘 礎)>의 설단(設壇)을
설치(設置)함으로서
오늘날 여주 先塋을
우리 海州鄭氏의 위대한 聖域으로
만드시고 기뻐하셨던 30년 전
선친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라 감개무량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쉽게 오지 않는
선조에 대한 봉사의 기회를
先親과 당시 함께했던 임원들께서
지혜(智慧)로운 결단이 발휘되어
후손들의 존경과 감사한 마음이
만대(萬代)에 이어질 수 있도록
문중 화합의 구심점이 될
해주정씨 大宗親會 組織
(파별, 시․도지회, 평․대의원)을
체계적으로
계획․설계․조직(計劃․設計․組織)하셨고
대의원, 평의원 인원을 공평하게
배정하고 구성하여 종무 체계를
향상시킨 점에서도 자긍심을
느끼게 됩니다.
평소
선친 채섭(號 晦堂)회장께서는
성품(性稟)이 온후(溫厚)했으며
곧은 기풍(氣風)과 재질(才質)이
출중(出衆)하셨고 문묵(文墨)을 즐기셨으며
필법(筆法)이 절묘(絶妙)하여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도 잘 쓰셨기에
컴퓨터가 발달되지 못한 시절에
선조의 업적을 분야별로 직접 조사하여
붓으로 기록한 영선록(榮先錄)과
종친회 연혁(1984년 4월 29일)을
편찬하여 전 종원에게 배포하였고
大同譜편찬위원장으로서
부위원장壽根(종파), 위원春根(우후공파),
璋根(승지공파), 泰健(종파),
泰賢(농포공파)의 協心으로 3여년의
노력 끝에 대동보(6刊譜 1985년)
4千秩을 출판하여 宗人은 물론
전국 대학교와 유명도서관에 배부하셨으며
우리들 책상위에 있는
“해주정씨 시조부터 12세까지 係譜”
체계도도 직접 구상하고
작성하였습니다.
선친의 방대(尨大)했던 업적을
작은 공적비에 다 담을 수 없는 아쉬움에
30여년전 행적(行蹟)과
해정의 역사적 발자취를 살펴보면.....
종로구 서린동에
해주정씨종친회 본부사무실을
처음으로 설치(1979년 7월 11일)하고
간판게양식을 갖는 기쁨도 나누었으며
해주정씨종친회 이름을
“해주정씨대종친회”로 개명
(1984년 10월 14일)했고
始祖와 정도공의 肖像畵(1985.10.6.)도
당시 문화공보부 泰辰씨의 협조를 얻어
여주 대령사(大寧祠)에 製作奉安하였으며,
태수(泰秀) 전 문교부차관께 의뢰하여
현 정도공 비문을 작문
(1984년 10월 23일)설치 했고,
후손의 우수인재(優秀人才) 양성을 위해
처음으로 장학제도를 신설하고
(84년 10월 14일) 장학금을
지급하였습니다.
종토 가운데
서초동185-13,14번지
대지 3,223평의 학교부지를 해제
(1983년 11월 14일)시켜 건축할 수
있는 대지로 전환시켰고,
사능 종가집 옆 일부건물을 매입하여
종택 개축공사도 완료
(86년 1월 25일)했으며
정곡빌딩 동,서관 2개동 건축도
의결하여(1985.5.8.) 설계도까지 확정
(1985. 8. 31)시켜 추진했으나
회장 임기 종료로 건축은 하지 못했지만
현재의 정곡빌딩이 세워지게 된
초석(礎石)이 되었으며
이 같은 업적 등으로 인해
오늘날 해주정씨대종친회 모습을
완성시킨 값진 삶의 결과를
남기셨습니다.
공적비 제막을 계기로
선조들이 남겨준 고귀한 유산(遺産)과
송조정신의 숭고한 뜻을
후손들이 본받아
海鄭의 산 교육장(敎育場)으로 활용되고
자긍심(自矜心)의 공간이 되길
희망하며 앞으로도
더 많은 공적비가 세워질 수 있도록
해정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후손(後孫)들이 많이 배출되길
소망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