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이 영정은 忠毅公 農圃 鄭文孚像으로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 379-32에 위치한 충의공 묘전 忠德祠에 봉안됩니다.
海州鄭氏 종친회와 의정부시의 제작의뢰로 지난 2004년 3월부터 시작된 정문부 표준영정 제작은 2004년 6월 21일 2시에 문화관광부 회의실에서 제1차 심의를 받았습니다.
그후 수정보완한 작품을 다시 제작하여 8월 9일에 같은 곳에서 제2차 영정심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3차 영정심의는 2005년 4월 26일에 문화관광부 문화정책국 국어민족문화과 주관으로 개최되어 심의위원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정문부 표준영정은 지정번호 7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높이 187cm에 1500자의 글을 담고 있는 이 비석은 숙종 35년(1709)에 세워졌다.)
▲ 충의공 정문부 장군 영정 © 윤여환 作
정문부 상 / 가로 103cm, 세로 173cm / 비단+먹+채색 / 2005
忠毅公 農圃 鄭文孚(1565~1624,명종20년~인조2년)
정문부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 해주(海州), 자 자허(子虛), 호 농포(農圃), 시호 충의(忠毅). 생원 진사와 문과에 급제, 승정원 주서(注書)를 시작으로 문관으로 있다가 자원하여 함경도 북평사(北評事)에 부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카또 키요마사(加藤淸正)군 2만이 동북 조선을 점령하자 내적이 반란 부역하고 북쪽 여진족이 남침하여 함경도가 안팎 3난에 휩싸였을 때, 선생이 창의군을 일으켜 의병대장이 되어 길주대첩 등 6대첩을 거두고 관북 천리땅을 수복하고 3난을 평정하였다.
임난 후 영흥부사를 시작으로 목사 부윤 등 여러 지방관과 예조참판을 두루 거쳤는데 형조 병조 참판 등 중앙관에 임명 되어도 이를 거절하였다.
인조2년, 박홍구 역모사건에 무고되었으나 무혐의 출옥될 무렵, 탐욕권신으로 인하여 시화(詩禍)를 입어 고문사 당하였다.
사후에 신원되고 선무원종1등공신 좌찬성 대제학으로 추증되고 북한에는 경성 창렬사 등 4개 사당에, 남한에, 진주 충의사와 의정부 충덕사에 배향되었다.
유고로 농포집(農圃集) 5권이 있고, 함경도민이 세운 전승비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러일전때 일본군이 빼앗아가 지금 동경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있었는데 2005년 한국으로 반환되여 원비는 북한으로 되돌려 함경도 길주 옜 그 자리에 세워지고 복제비는 장군의 묘소 독립기념관 진주시 이반성면 충의사 경내에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