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의 딸이다” | ||||
경혜공주 묘엔 문인석만 쓸쓸히 동생 단종과 남편 잃은 비극적 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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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서 12년째 사는 윤봉선 할머니(78세)는 말없이 쪼그리고 앉더니, 돌맹이로 땅바닥에 지도를 그리며 설명했다. 윤씨 할머니가 일러준 공주의 묘는 지척에 있지만 매우 멀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굽있는 신발로 어떻게 올라가냐”며 “신발을 빌려줄테니 신고 가”라는 외침을 뒤로 하고 아까 보았던 비석이 보이는 곳까지 다시 올라왔다. 경혜공주를 추모하는 비석이었다.
윤씨 할머니는 그 풀숲길을 따라 가다가 조그만 도랑을 어떻게해서든 건너라고 했다. 그러면 포크레인으로 닦은 길이 보일 것이라고. 금방 뱀이라도 나올것 같아 오싹한 생각이 들었지만 바지를 걷고 도랑을 건너자 장마로 엉망이 된 길이 이어졌다. 숨이 찰 만큼 뛰다 시피 올라갈 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곳에 공주의 묘가 있다는 말인가.
발굴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게 찾은 경혜공주의 묘가 마침내 보였다. 남편 정종의 묘도 비석과 함께 나란히 있었다. 공주의 묘를 일 년 가야 몇명이나 찾을까. ‘500년 동안의 고독’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공주의 삶은 비극 그 자체였다. 동생 단종과 남편 정종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데다 공주 자신까지 노예신분인 관비로 전락했다고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전한다.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야사이긴 하지만 실제로 관비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왕조실록 세조편에는 한동안 경혜공주라는 명칭이 사라지고 ‘정종의 처’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기간 동안 관비로 전락했다가 다시 복권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시 한번 <연려실기술>을 들춰 보면, 공주가 가혹한 운명 속에서도 얼마나 기개가 넘치는 인물이었는지 잘 나타난다.
“순천부사 여자신은 공주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 하였다. 그러자 공주가 곧 대청에 들어가 의자를 놓고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비록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 하므로 마침내 부리지 못하였다.”(단종조고사본말, 정종 편)
세조는 경혜공주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백성들의 여론을 두려워 했다고 한다.
공주의 묘 주위로 날벌레들이 어지러이 날고, 무덤을 굽어보는 소나무는 가지가 꺾여 있었다. 쑥부쟁이와 명아주 그리고 산딸기 가시덩굴이 온통 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문인석 두개와 장명등 만이 경혜공주의 묘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이라는 곡이 들리는 듯 했다.
경혜공주의 묘의 건너편 산에는 최영장군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무너지는 고려 왕조를 붙들고 조선 태조 이성계와 맞섰다 스러진 최영 장군. 그렇게 세워진 조선의 공주로서 왕위를 뺏으려는 숙부에게 고통당한 경혜공주. 두 사람의 비극적 운명이 시간을 뛰어넘어 서로의 슬픔과 한을 마주하고 있다. 저녁 7시가 가까운 시간, 무덤 주변으로 땅거미가 밀려왔다. 서둘러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와 공주의 묘를 알려준 윤씨 할머니를 다시 찾았다. “충렬사는 정태수가 지었지. 두 번 제사 지내는 가 싶더니 감옥가더구만.” 윤봉선 할머니는 한보 정태수 회장이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의 후손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