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영(鄭大榮) 집의공선조 아버지
북관대첩비의 주역 충의공 농포 선조양력
1565년 서울에서 출생
1581년 17세 고령신씨와 결혼
1584년 20세 생원 진사 초시에 합격
1588년 24세 명경과 갑과 제2위로 급제 한성부 참군
1591년 27세 함경도 병마평사에 임명
1592년 28세 임진왜란 발발, 4월에 부산함락
8월에 최배천 이붕수 등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
9월에 길주에서 왜적 격파
10월 회령에서 적장 5명, 적군 목 820개, 말 180필 노획
1593년 단천 백탑교 쌍포 장평전투등에서 대승, 관북지방을 평 정, 그러나 윤탁연의 무고하는 장계로 조정에서 불채택
1594년부터 영흥부사, 온성부사, 길주목사, 안변부사, 공주목 사, 호조참의
1599년 35세 11월에 문과 중시에 장원
1600년에 용양위 부호군, 예조참판, 장단부사 안주목사 남원부 사 길주목사
1613년 49세 시국의 혼란으로 관직을 사임, 조정벼슬에 불응
1618년 54세 창원부사
1623년 전주부윤
1624년 60세 박내장 등의 역적모의에 관련되었다는 무고 투 옥, 혐의 없음으로 판정되었으나 11월 19일 옥중에서 별세
1638년 사후 15년 길주목사 최유해가 그 후손을 찾아 등용하 라는 상소를 임금께 올림. 이에 임금이 명령
이후 여러 곳에 창렬사, 현충사 등 사당이 세워지고
사후 43년 1666년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 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특증함
1713년 사후 90년 시호를 충의라 비준하였으며
사후 124년이지난 1747년 충의공 시호를 하사한 교지를 받음.
1970년 진주 귀곡동에 전국유림의 발의로 사당이 세워지고
가호서원 충의사(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세움
1978년 국고보조로 사당복원 및 정화사업 추진
1980년 4월 26일 완공, 충의사 위패 봉안하여 오늘에 이름.
오늘날의 가호서원
- 농포선생의 14대 종손 정기민 의 노력으로
- 문화재청과 문화체육관광부의 살아 숨쉬는 향교서원 사업에 선정되어
- 가호서원 논어학교 설립 (정기민 교장이 취임)
- 달빛 음악회, 전통혼례, 종부와의 대화, 초등학생의 사자소 학, 할머니와 손자의 이야기교실, 성균관에서 주관하는 주자 석채의 등 왕성한 활동
- 2018년 초 김영근 성균관장님이 원장으로 취임, 많은 관심 과 서원 발전을 구상. 날로 발전을 거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