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투쟁사 /제2 편 3·1운동과 의열투쟁/제7장 1927~1930년의 의열투쟁| 독립운동사 2
제7장 1927~1930년의 의열투쟁
민족의 반일제적(反日帝的) 총력량(總力量)을 집결하여 폭발한 것이 3.1 운동으로 이는 새로운 민족 해방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3.1운동 후 우리 민족 해방 운동은 노농운동(勞農運動) 청년운동(靑年運動)이 보다 강력한 세력으로 대두되어 갔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彈壓)은 전민족(全民族)을 대상으로 일층 심해 갔을 뿐 아니라 일제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은 가일층 가혹해 갔다. 이러한 객관적인 정세 아래 우리 민족의 해방 운동은 전 민족적인 총력량을 집결할 필요에 당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청은 특히 1924년에 조직된 노총(勞總) 청총(靑總)의 합법 운동이 경찰의 탄압으로 불가능하게 되고, 1925년 이래 조선 공산당이 계속 검거되자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투쟁 조건이 불리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우리나라의 각 사회단체와 민족주의 단체가 총 망라되어 결성된 것이 신간회(新幹會)였다.
신간회 결성에 있어서 ‘민족적단일정당론(民族的 單一政黨論)’, 민족적공동전선체(民族的 共同戰線體)’ 등의 제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민중 전선으로서의 신간회의 탄생에는 누구나 모두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고, 당시 민족주의 단체로서 유일한 지위에 있던 1926년 5월에 조직된 민흥회(民興曾)와도 원만한 타협이 이루어져 마침내 1927년 1월 15일에 신간회 준비회와 합동 발기회를 구성하여 동년 1월 19일에는 다음과 같은 강령(綱領)을 발표하게 되었다.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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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는 단결을 공고(鞏固)히 한다.
3. 우리는 기회주의(機會主義)를 일체 부인함.
이 때 발기인은 신석우(申錫雨)·안재홍(安在鴻)·이정섭(李晶燮)·최선익(崔善益)·이순탁(李順鐸)·김준연(金俊淵)·이관용(李灌鎔)·문일평(文一平)·한용운(韓龍雲)·장길상(張吉相)·홍명희(洪命喜)·홍성희(洪性喜)·이승복(李昇馥)·조만식(曺晩植)·신채호(申采浩)·백관수(白寬洙)·한위건(韓偉健)·장지영(張志映)·권동진(權東鎭)·김탁(金鐸)·정재룡(鄭在龍)·이갑성(李甲成)·박동완(朴東完)·김명동(金明東)·유억겸(兪億兼)·이승훈(李昇薰)·이상재(李商在)·이정(李淨)·정태석(鄭泰奭)·박내홍(朴來弘)·최원순(崔元淳)·한기악(韓基岳)·이종린(李鍾麟)·이종목(李鍾穆) 등 34명이었다.
신간회(新幹會)는 처음 회명(會名)을 신한회(新韓會)라 하였으나 총독부 당국이 한(韓)자를 기피하였기 때문에 한(韓)자와 같은 뜻으로 쓰여지는 간(幹)자를 택하여 신간회(新幹會)라 하였는데 그 뜻은 고목신간(古木新幹)을 의미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강령을 발표한 후 결성 준비를 갖추어 가다가, 동년 2월 15일 경성 Y.M.C.A에서 삼엄한 일경(日警)들의 감시 가운데 진행되었다.
즉, 이날 오후 7시 15분 홍명희의 개회 선언 후 임시 의장에 신석우(申錫雨)를, 서기(書記)에 김준연(金俊淵)·장지영(張志映)·신현익(申鉉翼)을, 사찰(査察)에 권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