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 정대영(鄭大榮) 先祖 執義公墓碣銘 飜譯文
유명 조선국 성균생원 증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 봉곡 정공 묘갈명
(有明朝鮮國 成均生員 贈通訓大夫 司憲府 執義鳳谷 鄭公墓碣銘)
옛적에 숭정(崇禎) 갑신(甲申 : 1644)年에는 하늘과 땅이 번복되고 위와 아래가 뒤바뀌어 지사(志士)들이 피눈물을 딲으며 분통을 품었었다. 이 때에 봉곡(鳳谷) 정공(鄭公)과 같은 이가 있어 탄식하여 이르기를.
『명실(明室)의 신민(臣民)이 된 자로서 오히려 진취(進取)를 구할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방장산(方丈山) 산속으로 들어가 눈으로는 하늘과 해를 보지 않고 키로는 당시의 일을 듣지 않았다. 시간이 있으면. 작은 술 자리를 베풀어 큰 소리로 꾸짖었으며. 뭇 자제들에게 경계하되. 다시는 과거(科擧)에 응하지 말라고 하여 사대부(士大夫)들은 그 위풍과 절개를 높이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아! 아름답다.
공의 휘는 대영(大榮)이고 자는 여경(汝慶)이며 수양(首陽) 사람이다.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휘 숙(肅)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큰 벼슬을 이어 받았다. 정도공(鄭度公) 휘 역(易)은 증영의정(贈領議政)을 지냈고 휘 충석(忠碩)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휘 침(枕)은 문과에 올라 참의(參議)를 지냈으며 희검(希儉)은 성균관사(成均進士)로 당시에 연산군(燕山君)의 혼란한 정치를 만나게 되었다.
백씨(佰氏) 희량(希良)이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피하자 공도 역시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끝내 과거(科擧)에 나가지 않았다. 휘 언각(彦慤)을 낳았는데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며 곧 공에게 증조이다.
조(祖) 휘 신(愼)은 대사간(大司諫)으로 증직이 예조판서(禮曹判書)이고 고(考) 휘 문부(文孚)는 병조참판(兵曺參判)으로 증직이 좌찬성(左贊成)이고(考) 시호가 충의(忠毅)로 훌륭한 공훈과 위대한 절개가 있어 세상에서 『농포(農圃)선생』 이라 칭하였다.
비(妣)는 고령신씨(高靈申氏)로 봉사(奉事) 예(禮)는 그의 고(考)이다. 공은 어릴 적에 관구(灌毬)의지혜가 있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자 전쟁으로 어수선하다 하여 학문을 폐하지 아니하고 간간히 과거공부를 익혔다가 경술(庚戌;1610년)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하였는데 얼마 후에 서울의 변(變)을 당하자 용문(龍門)을 퇴거(退居)하여 경사(經史)에 잠심(潛心)하였고 오직 스스로 닦는 것을 가지고 일삼았다.
그러다가 북병<北兵;청(淸)나라의 군사>이 요동(遙東)을 함락 시켰다는 소문을 듣고 세상을 피할 결의를 하고는 남쪽 진주의 봉곡(鳳谷)으로 내려왔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공훈이 있는 신하 중에는 공과 함께 지냈던 요직의 인사가 많았고 또한 원상국 (元相國) 두표(斗杓)와 더불어 가장 잘 지냈으므로 전운사<轉運使;전운서(轉運署)에서 으뜸가는 벼슬> 감으로 허락하기에 이르렀는데 공은 과분한 것을 알고 끝내 응하지 않았다.
갑자(甲子;1624년)에는 충의공(忠毅公)이 시안(時案)을 가져 화(禍)를 입게 되자 공은 원한이 매우 망극하여 살려고 하지 않았으며 신주<神州;중국을 가리키는 말>가 오랑캐의 나라가 된 것을 보고는 더욱 더 당세에 뜻이 없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인생이 이 세상에서 이미 벼슬길에 드날려서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다면 집안을 꾸려 나가고 조상을 받드는 것도 역시 한 도리라』 하고는 종들을 다스려 농사를 힘쓰고 은둔(隱遁)생활로 심신(心身)을 수양하여 오직 명성(名聲)이 산 밖으로 나갈까 두려워 하였다.
무술(戊戌;1958년) 7월 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태어난 만력(萬曆) 병술(丙戌;1586년)년에 이르면73세가 되고 묘소는 하동군 횡천면 전대리 전대산(電帶山) 98번지 자좌(子坐)의 언덕에 있으며 뒤에 포상(褒賞)으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다.
효도와 우애가 순수하고 돈독하였으므로 신부인은(申夫人)항시 손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는 참으로 효자였다. 동생 인 승지공(承旨公)과 더불어 한 상(床)에서 식사하고 한 이불에서 잠을 잤으며 이따금 끌어안고 울면서 이르기를 <너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느냐? 라』고 하였다. 숙부가 살아계셔 백수(白首)로 같이 늙어 가는데도 섬기기를 아버지처럼 하였으며 부부 사이는 서로 공경하며 손님처럼 하였고 더욱이 제사 모시는 의의를 조심하였다.
남자 종이 수. 화(水. 火)에 변(變)이 있지 않으면 감이 안방에 들지 못하였으니 가법(家法)의 엄격한 유(類)가 이러하였다.
정묘(丁卯;1627)年에는 항복한 종(降奴) 홍립(弘立)이 오랑캐를 인솔하고 입관(入冠) 했었다. 이때 종가(宗家)는 파주에(坡州) 있었는데 공은 인마(人馬) 를 갖추어 맞아서 돌아왔으므로 약탈당할 걱정을 면하게 하였고 한 솥에서 같이 밥을 먹었으나 역시 이간(離間) 하는 말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비유하기를 <백번 참는 집안> 이라고 하였다.
공의 배(配)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익성군(益城君) 형령(亨齡)의 따님인데 성품이 곧고 순수하여 조금도 화려한 습성이 없었다. 만년에는 뭇 아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부자(夫子;부군을 말함 ) 와 더불어 五十年을 해로했지만 일찍이 한 번도 실없이 웃은 적이 없었고 심한 병이 아니면 일찍이 명령에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고하 였으니 역시 공이 집안을 다스렸던 한 단서(端緖)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공보다 3년 뒤에 태어나 공보다 10년 뒤에 세상을 떠났고 공의 묘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4남 4녀를 두었으니 남(男) 유정(有禎)은 증직이 좌승지로(左承旨) 가학(家學)을 이어 기술하여 세상에서 드날린 사람이 되었고 유상(有祥), 유우(有祐)는 좌승지(左承旨)에 증직 되었으며 그리고 유기(有祺)이다. 여서(女婿)는 권칭(權偁), 조 구(趙球), 이 강(李壃), 허 초(許礎)이고 손자와 증손 이하는 수백 명이 되는데 문학과 행실로 드날린 이가 많다.
아! 공은 큰 집 종손으로 선조(先祖)의 아름다움을 잘 이어 받았으므로 일찍 성균관(成均館)에 올라 명망이 매우 높았으므로 왕실(王室)을 보좌 했거나 임금을 도울 만 하였는데 불행히도 집안이나 나라에서 어려움을 만나 하늘과 땅을 포괄(包括)할 뜻을 조금도 보여 주지 못 하였으니 운명(運命)이라 아니 하겠는가 ?
그러나 그 한 몸에서 대의(大義)를 맡겼다면 드높게 혼란한 이 세상을 스스로 진정시켰을 텐데 세상을 피해 아무 걱정 없이 산 속에서 그림자를 감춘 것은 장차 백세(百世)가 지난다 하더라도 썩지 않을 것이니 어찌 통론을 다할 수 있겠는가? 공의 후손 봉원(鳳元)은 헌회(憲晦)와 더불어 동문(同門)의 정의가 있는 터이다. 하루는 찾아와서 공의 묘갈명(墓碣銘)을 써 달라고 부탁하며 이르기를『이는 오직 선사(先師) 인 매산(梅山) 홍(洪)선생이 일찌기 허락한 바이나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이니 자네가 대신하여 써주게나』 하였으므로 헌회(憲晦)는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방장산(方丈山) 드높아라. 그 뉘가 은거(隱居) 했느뇨?
오직 노 중련(魯仲連;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의사(義士)의 기풍(氣風)만 들을 뿐이어라』
숭정(崇禎) 4계해(癸亥;1863년) 8月 일에 통정대부 공조참의 겸 경연관(通政大夫 工曺參議兼 經筵官)서하(西河) 임헌회(任憲晦)는 짓다.
자헌대부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資憲大夫工曺判書 兼知義禁府事 五衛都總府都總管) 성산(星山) 이 원조(李源祚)는 쓰다.
역사는 시대의 증인이며 흘러가는 과거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에 선조의 삶을 역사 속에서 꺼내고 되살려 교훈 삼고 오래 기억토록 하는 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책무이기도 한 것 같아 이 자료를 미흡하지만 편집 해 보았습니다.
資料出處 : 海州鄭氏大同譜 卷 一 p275~ 280
충의공파(농포공파) 회장 정기승 해석문자료 제공
海州鄭氏農圃公派執義公宗中會長 鄭大根 原文 옮김
자료출처 해주대동보 1권 P 275~ 276
有明朝鮮國成均生員贈通訓大夫司憲府執義鳳谷鄭公墓碣銘並序
在昔 崇禎甲申天地縱覆冠腰倒置志士之抗血含痛極矣時則有若鳳谷鄉公歎曰為 明室臣民者尚可
以求進取耶遂入方大山中目不見天日耳不聞時事有時中酒悲憤叱咤仍戒諸子更切應學士大夫莫不高
其風節於乎休战公諱大榮字汝慶首陽人高麗侍中肅為初祖世襲紳纷貞度公諱易知中樞諱忠碩直提學
諱忧漁隱諱希儉尤以德業行義顯漁隱生諱彥怒戶曹架判即公曾祖也和諱慎大司諫 贈禮曹判書考諱
文字兵曹杂判 贈左贊成諡忠毅有豐功偉節世稱農圃先生她高靈申氏奉事極其考也公幼有灌进智遇
壬辰亂不以干戈培攘而廢學問習博士業中庚戌司馬旋值金墉之變退居龍門潛心經史惟以自修為事聞
北兵陷遼為避世計决意南下晋陽之鳳谷癸亥改玉熱臣多公舊要又與元相國斗构最善至以轉運材許公
其撒擬可知而終不應甲子忠毅公以詩案被禍公宽酷罔極如不欲生及見神州為戎則益無意於當世矣常
曰人生斯世既不讚揚仕路以酬國家則蓄家奉先亦一道也乃課僕力田遵養時晦惟恐聲聞之出於山外
以戊戌七月五日卒距其生萬間曆丙戊為七十三墓在州之青巖里電帶山子坐原後衰 贈司憲府執義孝友
純篇中夫人常謂諸孫曰汝父真孝子也與 弟承旨公聯床同被每抱持而泣曰汝能記先人顏貌乎有叔父白
首同老而事之如父夫婦相敬如賓尤蓮追遠之義男僕非有水火之變不敢入中門家法之嚴類如此丁卯降
奴弘立之導虜入秘也宗家在坡州公為具人馬邀歸俾免屠掠之患與之同髮亦無間言人比之百忍家云公
配全州李氏益城君亨齡之女性度貞順絕無綺絨習晚年語諸子曰余與夫子偕老五十年未嘗一嬉笑非甚
病未嘗不尬舞牌梳洗以執紡績也亦可見公刑家之一端也生後公三年沒後公十年树公墓左學四男四女
男有禎 贈左承旨承述家學為世聞人有样有祐 贈左承旨有祺女權懈趙球李瓊許礎孫曾以下殆累百
人多以文行著鳴呼公以 肖克趾先美早登上库聲譽認蔚若可以羽儀王庭 繃敞皇献而不幸遭罹家
國之難俾包天括地之心不少概見莫是命然其以一身任大義卓然自靖於長夜漫漫之中避世无問滅影
邱壑者將垂百世而不朽記可以窮通論哉公後孫鳳元與憲晦有同門誼一日來乞公魔性之文日是惟先師
梅山洪先生所書許之而未及成者子其代斷憲晦不敢辭銘曰
方丈之山高龍捷伊誰隱居其惟聞魯連之風者峽
崇禎四癸亥八月日
通政大夫工曹參議兼經筵官西河任憲晦撰
資憲大夫工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提府都攬官星山李源祚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