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新堂) 정붕(鄭鵬)선생의 안상도(案上圖)와 도학(道學)
李 完 栽 교수
1. 동양학(東洋學)과 도(圖)
나는 동양철학을 공부해 오면서 동서양학문에는 분명히 유형적 (類型的) 차이가 있음을 느껴 왔다.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학문은 대체로 서양식 학문유형인데 서양의 학문연원은 희랍학문에 근원하고 희랍학문은 인간의 특성을 이성적(理性的) 존재로 파악하고 이 이성의 냉철한 사고(思考)를 통하여 진리를 파악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진리파악은 엄밀한 논리적(論理的) 변증(辯證)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논리(論理)는 진리추구에 있어 필수불가결의 도구이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논리학이 진작 발달하였다. 희랍의 아리스토텔래스(B.C.384-322) 때 이미 논리전개의 기본 틀인 12단계설이 성립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시대적으로 비교될 수 있는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중국에서는 논리학이 전혀 발달하지 못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의 명가(名家)를 오늘날 학자들이 논리학파로 규정하고 있지마는 그 이론들이 서양의 논리학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서양의 논리학이 진리 천명의 도구였다면 동양의 명가설(名家說)은 정치적주장의 합리화를 위한 궤변(詭辯)의 방편에 불과했다. 왜 이러한 차이가 있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으나 한마디로 말해서 학문적 유형의 차이에 연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희랍에서 인간을 이성적(理性的) 존재로 파악한데 비하여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에서는 정리일관(情理一貫)의 보다 전인적(全人的)인 인간관(人間觀)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인간이해(人間理解)의 바탕위에서 그 학문의 유형도 달라진 것이 아인가 나는 생각한다. 희랍학문이 이성일변도(理性一邊倒)의 논리적 추구로 진리를 파악한데 반하여 동양에서는 전인적(全人的)인 직관(直觀)을 통하여 진리를 파악하고 이를 시각적(視覺的)으로 表現하려하였다. 가장 중국적인 특색을 잘 나타내고 또 중국철학의 연원을 이루는 주역(周易)의 원리를 설명하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바로 눈으로 볼 수 있는 도(圖)로 되어 있다. 하도, 낙서뿐만 아니라 송대(宋代)철학의 연원(淵源)도 렴계(濂溪)주돈이(周敦頤1017-1073)의 태극도설(太極圖說)로 시작된다. 하도와 낙서처럼 그림으로만 된 것을 도(圖)라 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처럼 그림에 설명을 붙인 것을 도설(圖說)이라 한다. 하도, 낙서나 태극도설은 중국학술사상에서 특히 두드러진 예이거니와 그 밖에도 많은 학자들이 자기가 체득한 사상이나 학문의 정수(精髓)를 도(圖)로서 표시한 예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으로 퇴계(退溪)이황(李滉1501-1570)선생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들 수 있고 퇴계와 고봉(高峰)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辨)의 계기를 이룬 추만(秋巒)정지운(鄭之雲1509-1561)의 천명도설(天命圖說),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양촌(陽村) 권근(權近1351-1409)의 입학도설(入學圖說) 등은 모두 우리나라 학술사상 대표적인 학문적인 도설(圖說)이다.
동양에 있어서 이러한 도나 도설은 흥미위주의 가벼운 기분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다. 서양의 학문이 엄정한 논리로 자기의 사상내용을 긴장감속에서 서술하듯이 동양의 도나 도설은 학자가 평생 닦아 체득한 학문내용의 진수를 일목요연하게 표현한 것이다. 다만 서양학자들이 논리적인 전개를 위주로 한데 반하여 동양의 학자들은 시각적인 도표를 위주로 하고 이론적인 설명을 보족적인 수단으로 사용한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뜻에 있어서 신당(新堂) 정붕(鄭鵬1469-1512)선생의 안상도(案上圖)는 정붕선생이 일생 탐구하여 체득한 학문의 정수(精髓)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안상도(案上圖)란 <책상위의 그림> 혹은 <책상머리의 그림>이란 뜻이다. 안(案)자는 <책상 案>자이다. 신당선생은 안상도를 책상머리에 그려두고 좌우명(座右銘)처럼 아침저녁으로 마음에 새기고 되뇌면서 이 안상도와 부합하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안상도는 곧 신당선생의 학문의 정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안상도(案上圖)의 해명
안상도는 대칭적(對稱的), 대대적(待對的)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즉 상대적인 두 가지 사실을 서로 맞세워 구성 배열하였다. 이 대칭적이란 표현을 좀 더 철학적인 용어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대대적(待對的)인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대대(待對)란 동양적 사물관(事物觀)의 철학적 표현이다. 즉 모든 사물은 단독적(單獨的)으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반대되는 것과 짝을 이루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 짝을 이루는 형식이 그저 대립적(對立的)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다른 두 존재가 서로 상대를 기다리고 필요로 하면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태극(太極)의 그림에서 양(陽)이 음(陰)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고 음(陰)이 양(陽)속이 깊숙이 들어가 있는 상태를 음양대대(陰陽待對)의 관계라고 한다. 동양에서는 모든 사물을 이와같은 대대(待對)의 관계로 파악하는데 안상도(案上圖)의 구성원리에도 이 대대의 원리가 적용되어 있다.
대대(待對)의 원리에 곁들어 체용(體用)의 원리도 배려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체용(體用)이란 용어도 사물의 존재양식(存在樣式)을 나타내는 철학적 개념이다. 즉 체(體)는 본체(本體)를 뜻하고 용(用)은 작용(作用)을 뜻한다. 체(體)와 용(用)은 서로 상즉(相卽)해 있어서 서로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 그리고 때로는 체(體)가 낳은 용(用)이 도리어 체(體)가 되고 용(用)을 낳은 체(體)가 도리어 용(用)이 되는 순환작용을 할 수도 있다.
이 대대(待對)와 체용(體用)은 동양적 사물의 존재양식(存在樣式)과 운동양식(運動樣式)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철학개념이다. 안상도(案上圖)는 이 원리를 밑바탕에 깔고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원리에 입각하여 안상도(案上圖)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낙천(樂天)-정기의관존기첨시(正其衣冠尊其瞻視)와
안명(安命)-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 대가 되고
둘째 존-경이직내(敬以直內) 엄약사(儼若思)와
성-의이방외(義以方外) 무불경(無不敬)이 대가 되고
셋째 명경(明鏡)-잠심이거대월상제(潛心以居對越上帝)와
지수(止水)-출문여빈승사여제(出門如賓承事如祭)가 대가 되고 그 아래 이어서
야복몽매(夜卜夢寐)와 주험처자(晝驗妻子)가 대가 되고
심물망(心勿忘)과 물조장(勿助長)이 각각 대가 된다.
넷째 아홉 가지 모습(九容)과 아홉 가지 생각(九思)이 대가 되고
다섯째 태(怠)와 욕(慾), 동심(動心)과 인성(忍性)이 가각 대가 되고 범범유유도불제사(泛泛悠悠都不濟事)와
면면순순자유소지(勉勉循循自有所至)가 각각 대가 된다.
위의 대대(待對)의 관계는 동시에 체용의 관계이기도 하다.
3. 도(圖)의 문구(文句)의 출전(出典)과 그 의미
첫째 낙천(樂天)과 안명(安命)조(條)에 관하여.
낙천(樂天)과 안명(安命)은 이 그림의 대강령(大綱領)이요 이념(理念)이라고 할 수 있다. 낙천과 안명이 어떠한 것이기에 그런가? 먼저 낙천(樂天), 안면(安命)의 뜻을 밝혀 보자. 주역계사(繫辭) 제4장에
「역(易)은 천지에 준(準)하는 것이라 천지의 도(道)를 감싸나니--천지와 흡사한지라 어김이 없으며 지(知)는 만물에 두루 미치고 도(道)는 천하를 이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침이 없이 두루 행하되 절도를 넘지 아니하고 낙천지명(樂天知命)하게 된다. 그러므로 근심하지 아니하며 제 자리에 평안하여 인(仁)에 독실한지라 능히 사랑하게 된다.
(易 與天地準 故能彌綸天地之道--與天地相似 故不違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 故不過 旁行而不流 樂天知命 故不憂 安土敦乎仁 故能愛)
이것이 낙천지명(樂天知命)의 출전(出典)이다. 낙천(樂天)은 천(天)을 즐긴다는 뜻이다. 천(天)은 유교(儒敎)의 궁극자(窮極者), 절대자(絶對者)개념이다. 모든 학문이나 종교가 그러하듯이 그 궁극적인 경지는 절대자와 합일(合一)되는 경지에 도달하는데 있다. 따라서 유가(儒家)학문의 궁극적인 경지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즉 사람이 하늘(天)과 합일되는데 있다. 낙천(樂天)은 절대자인 천(天)과 합일되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세계를 즐긴다는 뜻이다. 따라서 낙천(樂天)은 유가인(儒家人)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계인 것이다.
안명(安命)은 천명(天命)에 평안하다는 뜻이다. 천명이란 무엇인가?하늘이 내게 내려 준 나의 운명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타고난 나의 분수와 나의 한계를 말한다. 사람이 타고난 자기의 분수와 한계를 아는 것을 지명(知命)이라 한다. 사람은 타고난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알 때 건전한 자기의 삶을 누릴 수가 있다. 그러므로 논어의 맨 마지막 절에 공자께서 말하기를 “명(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不知命無以爲君子也)고 하였다. 안명(安命)은 지명(知命)의 결과에서 오는 현상이다. 지명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의 운명에 평안해 함을 말함이다.
우리는 철학에서 흔히 「우주와 인생의 근본원리를 탐구한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표현에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안상도(案上圖)의 낙천안명(樂天安命)이 바로 이 말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자연의 원리를 알아 그것을 즐기고 동시에 자신의 운명과 한계를 알아 그에 편안해 하는 것. 이 두 가지는 학자가 학문을 하는 궁극목적이이며 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것이다. 따라서 안상도(案上圖)에 있어서 이 낙천(樂天)과 안명(安命)은 이 그림의 대강령이다.
낙천(樂天)아래 정기의관존기첨시(正其衣冠尊其瞻視)는 낙천(樂天)을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실천방안이다. 이 말의 뜻은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높이 둔다」는 뜻으로 군자의 단정하고 엄연한 자세를 말한다. 이 말의 출전(出典)은 논어(論語) 요왈(堯曰)편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가 의관을 바르게 하고 바라봄을 높이하면 엄연하여 사람들이 바라보고 두려워하나니 이는 위엄이 있으되 사납지 않음이 아닌가?」(君子正其衣冠尊其瞻視 儼然人望而畏之 斯不亦威而不猛乎)고 하였다. 이 말은 또한 주자(朱子)의 경제잠(敬齊箴)의 첫 구절이기도 하다. 즉 낙천(樂天)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新堂선생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그 기본자세를 이와 같이 가지려고 했던 것이다.
안명(安命)아래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은 「자기가 바라지 않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의 마음은 같은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도 원하지 아니하고 내가 바라는 것은 남도 역시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지 않는 바 즉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그렇게 하기를 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공자의 사상에 있어서 행위의 중요한 준칙(準則)이다. 공자는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서 자공(子貢)이 “한마디 말로서 종신토록 행할 말이 있겠습니까?”(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하였을 때 답하기를 “서(恕)이니 자기가 하고 싶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 것이니라” (恕乎 己所不欲勿施於人)고 하였다. 서(恕)는 같을 여(如)와 마음심(心)의 합자(合字)이니 같은 마음이란 글자이다. 곧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려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은 남도 바라지 않을 것이니 그런 행동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논어안연(顔淵)편에서 중궁(仲弓)이 공자에게 인(仁)에 대하여 물었을 때에도 공자는 역시 이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으로서 대답하였다. 「기소불욕물시어인」은 공자가 강조한 대인적(對人的) 윤리행위의 핵심 개념이다. 이 「기소불욕물시어인」은 대학(大學)에서는 평천하(平天下) 즉 천하를 바로잡는 원리로까지 승화되어 있다. 대학전(傳)제10장에 평천하의 원리로 「혈구지도」(絜矩之道)가 설명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기소불욕물시어인」을 자세히 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를 실증하기 위하여 혈구지도를 여기 옮겨 보자.
윗사람이 내게 하는 바가 싫거든 그런 방법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아랫사람이 내게 하는 바가 싫거든 그런 방법으로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앞사람이 내게 하는 바가 싫거든 그런 방법으로 뒷사람에게 앞서지 말며 뒷사람이 내게 하는 바가 싫거든 그런 방법으로 앞사람을 따르지 말며 오른쪽 사람이 내게 하는 바가 싫거든 그런 방법으로 왼쪽 사람을 사귀지 말며 왼쪽 사람이 내게 하는 바가 싫거든 그런 방법으로 오른쪽 사람을 사귀지 아니하는 것 이것을 혈구지도라 한다.
(所惡於上 毋以使下 所惡於下 毋以使上 所惡於前 毋以先後 所惡於後 毋以從前 所惡於右 毋以交於左 所惡於左 毋以交於右 此之謂絜矩之道)
혈구지도(絜矩之道)란 자(矩)로 재(絜)는 원리(道)라는 뜻이다. 윗글에서 표준이 되는 자(矩)는 곧 나 자신이고 더 엄밀하게는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리하여 내 마음과 같이(恕) 행동하는 것이 곧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다.
안상도(案上圖)에서는 수양의 대전제로서 낙천(樂天)과 안명(安命)을 제시하고 그 실천내용으로 정기의관존기첨시(正其衣冠存其瞻視)로서 군자의 기본자세로 삼고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으로서 실천원리로 삼았다.
이를 체용(體用)의 원리로 따진다면 낙천이 체요 안명이 용이요, 정기의관이 체이고 기소불욕 물시어인이 용이다.
둘째 존과 성의 조에 관하여.
먼저 존과 성에 관하여 설명하면 존은 존양(存養)을 약하여 존이라 표시하였고 성은 성찰(省察)을 약하여 성으로 표시하였다. 존양(存養)을 다시 풀이하면 존심양성(存心養性)이 되고 성찰(省察)은 반성관찰(反省觀察)의 약어(略語)이다. 존양성찰은 유가(儒家)의 중요한 수양방법이다. 그러면 존심(存心)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마음을 간직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마음이 언제나 내 몸의 주체로서 항상 내 몸과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잡으면 있게 되고 놓아버리면 없게 되어 나가고 들어옴에 때가 없어서 그 향하는 바를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마음이라 할진져”(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하셨다. 온갖 사물을 쫓아 들락날락 출입이 무상한 것이 마음의 실상이다. 마음이 나가버린 상태의 나의 육신은 한갓 고기덩이에 불과한 것이니 그러한 나의 육신이 건전한 윤리적 주체의 역할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의 마음이 내 몸의 확실한 주체로서 내 몸에 간직되어 있을 때 비로소 내가 확실한 한 인간으로서 굳건히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학문의 길은 별것이 아니라 밖으로 내 다르는 마음을 거두어 드리는 것이다」(學問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고 하였다. 밖으로 내다르는 마음을 거두어드려 내속에 간직해 있는 것이 존심이다. 성리학(性理學)에서는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 하여 심(心)이 성정(性情)을 통섭(統攝)한다고 한다. 즉 마음속에 성(性)과 정(情)이 포섭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존심(存心) 즉 마음을 간직해있어야 그 속에 있는 성(性)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본성(本性)이 길러진다고 한다. 인, 의, 예, 지의 본성이 길러지는 것 이것이 양성(養性)이다. 이 야성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존심(存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 의, 예, 지의 본성을 길러 생활에 실천을 하는데 그 실천이 절도에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를 반성하고 관찰하는 것이 성찰(省察)이다. 그러므로 존양과 성찰은 유가의 수양에 있어서 표리의 관계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존 아래의 경이직내(敬以直內),
성 아래의 의이방외(義以方外)가 또한 대대(待對)의 관계이다.
경이직내(敬以直內)와 의이방외(義以方外)는 주역(周易) 문언전(文言傳)에 나오는 말이다. 경의직내(敬以直內)는 「경(敬)으로써 안(內)즉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고, 의이방외(義以方外)는 「의(義)로써 밖(外)즉 행동을 방정하게 한다.」는 뜻이다. 경이직내는 내적으로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고 의이방외는 외적으로 실천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이것도 또한 체용(體用)의 관계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것은 경(敬)의 개념에 관한 문제이다. 경이직내의 경(敬)의 의미는 일반적인 윤리적 행위로서의 공경의 의미가 아니라 극도로 순화된 순일(純一)한 정신경계를 뜻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종래의 유가의 윤리적인 의미의 공경(恭敬)에서 철학적으로 심화된 정신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학(儒學)은 본래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지향하는 학문으로 윤리학적 성격이 강하고 형이상학(形而上學)적 성격이 약했다. 그런데 불교가 중국에 전래하여 생사문제(生死問題)를 다루고 내세문제(來世問題)를 다루어 중국특유의 화엄철학(華嚴哲學)인 이사무애(理事無碍)의 거창한 철학체계를 형성하게 되자 이에 자극받은 유학이 유학의 철학화(哲學化)를 통하여 불교를 극복하려 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송대(宋代)유학의 발흥이다. 송대유학은 이기철학(理氣哲學)의 이론으로 불교의 이사이론(理事理論)을 극복하였다. 그러나 중국불교에는 이론체계 외에 불입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 즉 「문자를 내세우지 아니하고 바로 본성을 직시하고 성불한다.」는 이념을 내세워 정신적 수련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으려는 선종(禪宗)의 수련방식이 있었다. 송대 유교가 불교를 철저히 극복하려면 불교의 이 내면적 수련방법에 대응하는 유가(儒家)의 정신적 수련방법이 강구되어야만 했다. 이에 대응(對應)된 것이 경(敬)의 사상이다. 그 경의 근거를 경이직내(敬以直內)의 경(敬)에서 구했다. 그리하여 모든 학문활동의 정신적 근거를 경(敬)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대의 학문방법을 한마디로 거경궁리(居敬窮理)라고 할 수 있는데 먼저 경(敬)의 정신상태에 입각해서 궁리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경(敬)의 개념규정에 있어서는 학자들에 따라 각기 다르나 주자는 선유(先儒)들의 경의 개념규정가운데 특히 4개조를 들었다.
첫째 정이청(程伊川)의 정제엄숙(整齊嚴肅) 즉 몸과 마음을 단정하고 엄숙하게 가지는 것.
둘째 역시 정이천의 주일무적(主一無適) 즉 마음이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딴 곳으로 흩어져 가지 않는 상태.
셋째 사상채(謝上蔡)의 상성성(常惺惺) 즉 마음이 항상 별빛처럼 또렷이 깨어 있는 상태.
넷째 유정부(游定夫)의 기심수렴 불용일물(其心收斂不容一物) 즉 마음을 거두어드려 아무런 잡념이 없는 상태.
주자가 이 경(敬)의 4개조를 강조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이를 경공부(敬工夫)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많이 받들었다. 이러한 경(敬)사상의 근거를 송대 유자들은 역(易)의 경이직내(敬以直內)에서 찾으려 하였다. 따라서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는 근세유학의 수련에 있어서 절대적 원리가 된 것이다.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 아래의 엄약사(儼若思)와 무불경(無不敬)이 또한 대대의 관계이다. 이 말은 예기(禮記)의 첫째편인 곡례(曲禮)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엄약사(儼若思)는 선비의 태도가 깊이 사색하듯이 엄숙해야한다는 뜻이고 무불경(無不敬)은 매사를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는 뜻이다. 엄약사는 외적 기본자세이고 무불경은 내적 정신자세이다.
그런데 이 엄약사와 무불경은 예기전편의 핵심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예기는 유교의 오경(五經)중의 한 경전이다. 유교문화는 한마디로 예문화(禮文化)라고 할 수 있다. 공맹(孔孟)의 인의정신의 외적표현이 곧 예(禮)인 것이다. 그 예의 핵심정신이 곧 엄야사(儼若思)이며 무불경(無不敬)인 것이다.
이 존성(存省)의 항(項)은 낙천(樂天)과 안명(安命)을 추구하는 보다 실질적인 수양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명경(明鏡)과 지수(止水) 조에 관하여.
명경(明鏡)은 밝은 거울이고 지수(止水)는 고요한 수면이다. 밝은 거울과 물결이 일지 않는 수면은 사물을 잘 비추기 마련이다. 이 말은 사람의 심체(心體)를 비유한 말인 동시에 수양된 사람의 정신적인 경계를 표현한 말이다. 「성인(聖人)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聖人之心如鑑)는 말이 있다. 거울이란 어떤 사물이 앞에 나타나면 그대로 비추고 그 사물이 사라지게 되면 아무것도 없는 밝은 본래 모습의 거울이 된다. 성인의 마음도 그와 같다는 것이다. 즉 외물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인이 되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사물에 애착을 가져 이미 지나간 사물에 대해서도 애타게 잊지 못하고 다가오지 않은 사물에 대해서도 애타게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여기서의 명경(明鏡)과 지수(止水)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 집착함이 없이 성인(聖人)처럼 사물을 바라보고자 하는 염원(念願)을 나타낸 것이다.
명경(明鏡) 아래 잠심이거대월상제(潛心以居對越上帝)는 주자의 경제잠(敬齊箴)에 나오는 말로서 그 뜻은 「마음을 가라앉혀 상제를 우러르듯」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대구(對句)가 되는 지수(止水)아래의 출문여빈승사여제(出門如賓承事如祭)도 역시 경제잠(敬齊箴)에 있는 말로 그 뜻은 「문을 나서면 손님처럼 으젓하고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제사를 모시듯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은 본래 논어안연장(顔淵章)에서 「중궁(仲弓)이 인(仁)을 물었을 때 공자가 말씀하기를 ‘문을 나서면 큰 손을 대하듯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하고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아니하면 나라에 있어서도 원망이 없고 가정에 있어서도 원망이 없느니라’.」(仲弓問仁 子曰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라 한 것을 경제잠에 인용한 것이다.
이 두 구절은 다 같이 주자가 경제잠(敬齊箴)에서 경(敬)의 방법으로 강조한 것이니 다 같이 경건한 마음가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잠심이거대월상제(潛心以居對越上帝)는 정시(靜時)의 마음가짐이요 출문여빈승사여제(出門如賓承事如祭)는 동시(動時)의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안상도(案上圖)에서 이를 대비시킨 것은 동시(動時)나 정시(靜時)를 막론하고 언제나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마음가짐을 갖고자함을 나타낸 것이라 할 것이다.
그 아래 야복몽매(夜卜夢寐)와 주험처자(晝驗妻子)는 경전(經典)에서 인용한 말이 아니고 신당(新堂)선생 자신이 안출(案出)하여 대비시킨 듯하다. 즉 그 뜻은 「밤에는 꿈과 잠자리에서 알아보고」(夜卜夢寐), 「낮에는 처자한테서 징험한다」(晝驗妻子)는 뜻이다. 즉 밤에는 꿈속이나 잠자리에서도 거울과 같이 밝은 마음인가를 바라고 낮에는 처자를 대하는데 있어서 애증(愛憎)에 이끌림이 없이 고요한 수면(水面)과 같은 마음가짐인가를 실험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주야를 통한 생활에 있어서 일관되게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을 가질려는 바램을 나타낸 것이다.
그 아래 심물망(心勿忘)과 물조장(勿助長)은 경공부(敬工夫)의 구체적인 방법이다. 이 말은 맹자공손추장구상(公孫丑章句上) 호연장(浩然章)에 나오는 말이다. 즉 「반드시 일삼는 바가 있으되 (그 결과를) 예기하지 말고 마음에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아서 송나라사람처럼 함이 없으라.」(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 無若宋人然)가 그 출전(出典)이다. 이 말은 본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방법으로 제시된 말이다. 그러나 후세 학자들은 경(敬)공부의 방법으로 이 말을 많이 원용했다.
맹자의 학문방법은 내적(內的) 추구이었다. 앞에서 인용했듯이 맹자는 말하기를 「학문의 길은 별것이 아니라 밖으로 내달리는 마음을 거두어 드리는데 있다」(學問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고 하였다. 앞에서 말한 필유사언(必有事焉) 즉 「반드시 일삼는바」라는 것이 다름 아닌 구기방심(求其放心) 즉 밖으로 내달리는 마음을 거두어드리는 것이다. 마음을 거두어드리되 그 결과의 효과를 예상한다든가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를 바라는 마음은 이미 욕심이고 마음의 순수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딴 생각 없이 그저 마음을 거두어드리기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잊지 않은 것 그것이 곧 심물망(心勿忘)이다. 마음 모우기를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음을 모우되 그 마음을 흩으리지 않으려고 억지로 힘을 써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물조장(勿助長) 즉 억지로 힘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억지로 힘을 쓰게 되면 마음을 모우기는 커녕 도리어 해를 가져온다 하고 어떤 어리석은 송나라 사람의 예를 들었다. 즉 송나라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자기 모가 잘 자라지 않는 것을 답답하게 여긴 나머지 모를 길게 뽑아 올렸더니 모가 그만 시들어버렸더라는 고사를 인용했다. 마음 모우는 공부도 이와 같이 무리하게 억지로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심물망(心勿忘)과 물조장(勿助長)은 맹자의 마음모우는 공부에 있어서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후대에 경(敬)공부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많이 강조되었는데 안상도(案上圖)에서 극명하게 드러낸 것은 의미가 깊다고 할 것이다.
넷째 아홉가지 모습(九容)과 아홉가지 생각(九思)에 관하여
도(圖)에서는 용(容)자와 사(思)자를 크게 쓰고 그 아래위로 아홉 글자씩을 느려 놓았는데 그것은 곧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를 도표화(圖表化)한 것이다.
구용(九容)은 예기옥조(玉藻)편에 나오는 말로서 이 도표를 풀어서 그 원문과 뜻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족용중(足容重) 발가짐은 무거워야 하며
수용공(手容恭) 손가짐은 공손해야 하며
목용단(目容端) 눈가짐은 단정해야 하며
구용지(口容止) 입을 함부로 놀려서는 아니 되고
성용정(聲容靜) 목소리는 조용해야 하고
두용직(頭容直) 머리는 반듯하게 가져야 하고
기용숙(氣容肅) 기상은 엄숙하게 가져야 하고
입용덕(立容德) 선 모습은 덕성스러워야 하고
색용장(色容莊) 얼굴표정은 장엄해야 한다.
구사(九思)는 논어계씨(季氏)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이다. 그 원문과 뜻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시사명(視思明) 보는데 있어서는 분명하고자 하고
청사총(聽思聰) 듣는데 있어서는 똑똑하고자 하고
색사온(色思溫) 표정은 온화하고자 하고
모사공(貌思恭) 태도는 공손하고자 하고
언사충(言思忠) 말은 충직하고자 하고
사사경(事思敬) 일은 공경스레 하고자 하고
의사문(疑思問) 의문이 있을 때는 묻고자 하고
분사난(忿思難) 분이 날 때는 뒷 끝이 어려울 것을 생각하고
견득사의(見得思義) 이득이 있을 때는 의리를 생각한다.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는 다 같이 처신(處身)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나 엄밀히 구분한다면 구용은 단순히 내 자신의 바른 몸가짐의 원리이고 구사는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 가져야 할 바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즉 처신을 바르게 하고 처사(處事)를 바르게 하려고 하는 의도이다. 따라서 구용이 체(體)라고 한다면 구사는 용(用)이 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안상도(案上圖)는 여기까지가 수도(修道)의 기본구조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태(怠)와 욕(慾), 동심(動心)과 인성(忍性) 조에 관하여.
위 넷째 조까지는 수도(修道)의 기본구조를 밝히고 여기서는 위의 수도를 게을리 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를 밝히고 그에 대한 대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밝히고 있다.
태(怠)와 욕(慾)이 대대구조인데 태(怠)는 「게으를 태」자로서 위의 수도를 게을리 한다는 뜻이다. 욕(慾)은 위의 정당한 수도의 태도와는 다른 허욕(虛慾)을 뜻한다. 태(怠)와 욕(慾)은 건전한 수행을 저해하는 절대적인 금물이다. 이 그림에 있어서 이 두 가지는 경계의 조항으로 제시한 듯하다.
그 아래 동심(動心)과 인성(忍性)이란 말은 맹자고자장하(告子章下)의 글에서 인용한 표현이다. 그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하면 반드시 먼저 그 심지(心志)를 괴롭게 하고 그 근골(筋骨)을 수고롭게 하고 그 체부(體膚)를 굶주리게 하고 그 몸을 공핍(空乏)케 하여 행함에 있어서 그가 하는 바를 흩뜨리고 어지럽게 하나니 그 까닭은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질을 참도록 하여 그가 능하지 못한 바에 보탬이 되게 하는 것이다.
(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이 동심인성(動心忍性)을 주자(朱子)는 주석하기를 「그 마음을 크게 움직이게 하고 그 성품을 굳게 참는 것을 말한다.」(謂竦動其心 堅忍其性也)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동심인성(動心忍性)은 게으름(怠)이 생길 때는 크게 마음을 격동하여 그 게으름을 떨치도록 하고 욕심(慾)이 생길 때에는 성품을 굳게 참아서 욕심을 이겨내고자 함이다.
범범유유도불제사(泛泛悠悠都不濟事)는 「어정어정 태평스레 지내면 아무런 일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에 대구(對句)가 되는 면면순순자유소지(勉勉循循自有所至)는 「노력하고 노력해서 법도를 따르게 되면 저절로 목적한 바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앞에서 잠간 언급했듯이 이 부분은 안상도(案上圖)의 말단부분으로서 앞에서 실천을 강조한 규범을 게을리 하면 온갖 욕심이 생겨나니 그럴 때는 크게 마음을 가다듬고 인내해야함을 가르치고 결론적으로 어정어정 세월을 보내면 아무 일도 되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노력하면 기필코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상이 안상도(案上圖)의 내용이다. 위의 해명에서 알 수 있듯이 안상도는 유학의 여러 경전가운데서 유학이 추구하는 핵심이념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그 이념들을 유기적으로 조직화하고 그 사상체계를 실생활에 있어서 어떻게 체현할 수 있는가의 방법까지를 소상하게 명시하여 하나의 통일된 사상체계를 갖춘 도(圖)라고 할 수 있다.
3. 신당(新堂)선생과 도학(道學)
앞에서 서술한 안상도(案上圖)는 신당(新堂)선생의 도학(道學)의 밑그림이요 이정표(里程標)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안상도를 책상머리에 붙여두고 평생 이를 수행실천하려 하였으니 선생의 도학이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으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고 또 선생의 일생의 행적(行蹟)이 이를 실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도학(道學)이란 말을 쉽게 쓰면서도 그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도학의 개념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유교를 중심한 학문개념이 여러 가지이다. 경학(經學), 훈고학(訓詁學), 이학(理學) 또는 성리학(性理學), 도학(道學), 고거학(考據學) 등 학문개념이 다양하다. 이러한 다양한 학문은 유학이 오랜 역사를 지내오면서 전개된 시대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도학(道學)에 대하여 언급하기 전에 이들 여러 학문개념에 대해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경학(經學)은 유교경전에 대한 연구를 넓은 의미로 경학이라 한다. 진(秦)이 법(法)을 숭상하고 유학을 배척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하다가 망한 후에 한(漢)이 일어나 유교를 관학(官學)으로 삼으면서 유교경전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경학(經學)이 시작되었다. 그 경학의 구체적인 내용의 한 분야로 나타난 것이 훈고학(訓詁學)이다. 훈고학은 유교경전안의 문자의 바른 음과 뜻을 밝혀 경전의 뜻을 바로 이해하려는 학문이다. 이 훈고학은 한 대(漢代)에 비롯하여 당대(唐代)에 걸쳐 크게 발달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같은 학문적인 업적을 낳았다. 유학이 현실경영에 열중하고 훈고학에 몰두하고 있을 지음에 인도로부터 불교가 들어와 존재의 본질과 생사(生死)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중국학계의 관심은 불교에로 크게 기우러지게 되었다. 이에 자극받아 생겨난 것이 송대(宋代)의 이학(理學)이다.
송대의 유학은 한마디로 유학의 철학화(哲學化)이다. 송대유학은 렴계(濂溪)주돈이(周敦頤1017-1073)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시작된다. 주렴계는 태극도설에서 태극(太極)이 음양(陰陽)을 낳고 음양이 오행(五行)을 낳고 오행이 결합하여 삼라만상을 낳는다고 우주생성을 설명하였다. 이 주렴계에 수학한 명도(明道)정호(程顥1032-1085), 이천(伊川)정이(程頤1033-1107)형제는 주렴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주의 근원을 이(理)라고 하고 만상은 이(理)의 갈라짐(分殊)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한편 횡거(橫渠)장재(張載1020-1077)는 우주의 근원은 기(氣)라고 하고 이 기(氣)의 이합집산(離合集散) 즉 기의 모임과 흩어짐에서 만물이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이 이(理)와 기(氣)철학을 종합집대성한 것이 주자(朱子)의 이기철학(理氣哲學)이다. 이 이기철학은 송대(宋代)에서 명대(明代)에 걸쳐 크게 유행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송명이학(宋明理學)이란 말로 널리 일컬어진다.
이학(理學)은 종래의 훈고학과는 달리 유교경전을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에 있어서 학자들의 사색과 체험의 깊고 얕음에 따라 천차만별의 차이가 생겨나고 동시에 지나치게 관념화되어 일정한 준칙을 정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서 생겨난 것이 청대(淸代)의 고증학(考證學) 또는 고거학(考據學)이라 하는 것으로서 경전의 해석에 있어서 옛 학설의 근거에 입각해서 고증적 방법으로 하자는 주장이 생겨났다.
위에서 유학이 오랜 역사를 통하여 전개된 학문양상을 간략히 살펴보았거니와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도학(道學)은 어느 시대에 일어난 학문이며 어떤 내용의 학문인가?
도학(道學)이란 말은 송대(宋代)에 비로소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중국 25사(史) 가운데 송사(宋史)에 처음으로 도학열전(道學列傳)이 나온다. 그 서두에 도학열전이 생기게 된 긴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그 전문(全文)을 옮기기는 번거롭고 그 요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는 도학(道學)이란 말이 없었다. 고대 하(夏), 은(殷), 주(周)의 성시(盛時)에는 천자(天子)가 도(道)로써 천하를 다스리고 백성들은 그 은택아래 도를 생활화하였으니 도학을 따로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춘추(春秋)시대에 이르러 천하가 혼란하여짐에 공자께서 문적(文籍)을 정리하여 대도(大道)를 밝히시고 이 도가 자사(子思), 맹자(孟子)에게로 전해졌으나 맹자이후 도는 단절되었다. 천여년의 단절후 송(宋)에 이르러 염계(濂溪)주돈이(周敦頤)가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를 지어 도의 근원을 밝히고 그에게 배운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형제가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표장(表章)하고 남송(南宋)의 주자(朱子)가 이를 집성(集成)하여 유학(儒學)의 대도(大道)를 크게 밝혔다. 이에 정주(程朱)의 후학들이 도학전(道學傳)을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도학열전(道學列傳)에는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의 저명한 이학자(理學者)들을 사승(師承)계보를 따라 열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학(道學)과 이학(理學)은 같은 학문이라는 뜻인가? 이학(理學)의 수창자(首唱者)인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은 특히 중용(中庸)을 중시하였는데 중용의 수장(首章)이 이학의 발원처라고도 볼 수 있다.
「하늘(天)이 명(命)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이에 대하여 정자(程子)는 「성(性)은 이(理)이다.」(性則理也)하고 주자(朱子)는 「천(天)은 이(理)이다.」(天則理也)고 하였다. 즉 우주만유의 실체를 이(理)로서 파악했던 것이다. 여기에 송대유학을 이학(理學)이라 하게 된 까닭이 있다.
그러면 도(道)는 무엇인가? 「성(性) 즉 이(理)를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한다.」 다시 말하면 이(理)를 실천하는 것을 도(道)라 했던 것이다. 도(道)는 「길」도자이다. 길은 사람들이 일상 걸어 다니는 길이다. 이 길을 추상화하여 사람들이 마땅히 가야할 도리의 도(道)가 된 것이다. 따라서 도(道)자에는 실천의 의미가 있다.
이학(理學)을 흔히 궁리진성(窮理盡性)의 학문 즉 「이(理)를 궁구(窮究)하고 성(性)을 극진(極盡)히 하는 학문」이라고 하는데 「궁리진성」을 올바르게 하면 도덕적인 실천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송대 이학자들이 송학(宋學)의 계보를 정리하면서 이학열전(理學列傳)이라 하지 않고 도학열전(道學列傳)이라 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 유학은 본래 윤리적이요 실천적인 학문이다. 도학(道學)이란 표현이 보다 더 진리를 실천하고 생활에 체현한다는 유학 본래의 정신에 합당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결론적으로 도학(道學)은 우주와 인생의 원리를 탐구하고 이를 실천적으로 생활에 체현(體現)하는 학문이라고 규정지울 수가 있다.
이 학문과 신당선생을 연관지워 볼 때 한 마디로 신당선생은 도학에 철저한 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를 다음의 3가지 근거로서 확언 할 수가 있다.
첫째는 안상도(案上圖)를 통해서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안상도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추구하는 유학의 핵심사상을 유교의 여러 경전가운데서 발췌(拔萃) 적시(摘示)하고 그를 실현하는 방법까지 제시하고 그 실천을 위해 일생을 부지런히 노력하셨으니 그 도달의 경계가 어떠하였을까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둘째는 속세를 벗어난 선생의 생활 태도에서 알 수 있다.
선생은 천품이 도(道)에 가까운 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사람은 누구나 입신출세하여 부귀공명을 누리고자 한다. 조선조의 사대부에 있어서 입신출세의 길은 오직 과거에 응하는 길이었다. 그런대도 선생은 초년에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과 교유하면서 과거에 뜻이 없었다. 숙부의 질책에 의하여 부득이 과거에 응하였고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승진에 연연하지 않았고 기회 있을 적마다 정계에서 물러서고자 하였다. 이 점이 바로 선생의 도학적 소양 탓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관직생활에 있어서 청송부사로 있으면서 영상 성희안(成希顔)의 백자(栢子)와 봉밀(蜂蜜)청탁을 거절한 일화는 천고에 그 유례가 드물다고 할 것이다. 이는 세속적 부귀공명을 초개같이 여길 수 있는 도학적 수양이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처신이라 할 것이다.
셋째로 밝은 지혜가 도학의 깊이를 말한다.
도학은 헛된 욕심이나 부질없는 공명심과는 거리가 멀다. 오직 순연(純然)한 본성(本性)에 충실한 학문이다. 사람은 욕심의 노예가 될 때 지혜가 가리어진다. 그와 반대로 마음을 비우고 허령불매(虛靈不昧)한 마음의 본체를 유지할 때 사물의 실상을 바로 볼 수가 있고 앞으로의 전개도 예측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가 있다. 선생이 홍경주(洪景舟 ?-1521)를 한번 보고서 큰 재앙을 일으킬 사람임을 간파하고 벼슬을 그만두고자 했다는 사실은 선생의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얼마나 밝았는가를 웅변하는 것이다. 이 사실 외에도 여러 가지 사건에 있어서 그 결과를 정확하게 예견했다는 일화들이 있다. 이 사실은 곧 선생께서 평소 꾸준한 도학적 수련을 통하여 그 영대(靈臺)가 크게 맑았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위에서 신당(新堂)선생의 도학적 실상을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 설명했거니와 선생의 도학은 이 나라 뿌리 깊은 도학에 연원하고 거기에 선생의 탁월한 도학적 천품이 융합되어 이룩된 결과라고 할 것이다. 선생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선생의 제자이다. 그리고 한훤당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선생의 제자이고 점필재는 아버지인 김숙자(金叔滋1339-1456)에 수학하였는데 김숙자는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의 문하이고 길재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제자이다. 그러고 보면 신당(新堂)선생은 포은(圃隱)선생이래 면면(綿綿)히 이어 온 이 나라의 도학(道學)의 정맥(正脈)을 이어 오신 분이다. 불행하게도 선생은 46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 그 학문을 더욱 발전시키지 못하셨으니 참으로 한(恨)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퇴계(退溪)선생께서 “선생의 학문적인 조예의 정심(精深)함은 후학들이 안상도에서 살펴보아야 한다”(先生學問所造之精 後學當觀於案上圖矣)고 하신 말씀을 미루어 보면 퇴계선생께서도 선생의 안상도(案上圖)의 정치(精緻)함을 높이 평가하셨음을 알 수 있다.